2025 이채연, 그의 방에 '파'며들다_시방아트 봄호
때로는 별것도 아니어 보이는 경험이 당사자만이 잡아낼 수 있는 어떤 신호탄 같은 것이 되어 인생의 중요한 디딤돌로 작용할 때가 있다. 그날 대파의 푸른 손짓이 이채연 작가에겐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어릴 때 밖에서 막 놀다가 집에 돌아가는 시간 있잖아요. 하늘이 슬 빛 바래지고 찌개 보글보글하고 밥 짓는 냄새가 골목에 풍기기 시작하는 시간. 우리 아가가 아직 내 품에 쏙 들어오던 때였어요. 나는 참 좋았어요. 아기랑 딱 붙어있을 때의 그 꽉차는 만족감. 지금도 그건 그리워요."
그 날도 아기띠로 어린 아들을 앞으로 메고 들쳐 메고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단다.
어라 저 앞에 작가와 닮은 여자가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묘하게 나 같았어요. 머리는 대충 틀어 올리고 옷도 뭔가 비슷하게 입었고...... 아무튼 분위기가!"
어딘가로 바삐 종종종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예사롭게 보는데 별안간 그녀의 손에 들린 봉지 속의 대파가 뒤를 돌아보며 인사를 하더란다.
"맞아요. 까만 봉다리에서 저 하나만 삐쭉 나와서는 명랑하게 나 여기 있어- 하고 말을 하는 거예요. 진짜 이상하죠. 파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멀거니 쳐다보다 보니 여자도 여자지만 대파가 꼭 나처럼 느껴졌어요. 정해진 시간이 되면 부엌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12시의 신데렐라처럼. 나와 닮은 저 바쁜 여자나 우리 엄마처럼. 그리고 아기를 업고 있는 나처럼"
회화계열 미술입시를 겪어본 사람들에게 파는 매우 친숙한 정물이다. 우리는 파를 식자재가 아니라 오브제로서 먼저 접했다. 이채연 작가는 유독 대파를 잘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만만'했을 것이다. 게다가 생김새를 보라. 난초처럼 우아하게 ㄱ자로 접히기까지 한다. 일필휘지에 환상이 있고 생활과 작품이 긴밀히 연결되는 작가의 특성상 파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건 인과관계가 명확해 보인다.
그날 이었다. 수월하게 가져다 쓰던 파가. 그러나 그 파가 말을 건넨 어느 날 오후, 파는 이채연 작가만의 메타포로 확실하게 걸어 들어왔다.
내가 이채연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사오년 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동부창고가 콜라보로 예술 교육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우리는 참여 예술가였다.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던 중 우리가 같은 지역민(진천)인데다 서울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낯선 충북 땅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나는 그것만으로도 일방적인 내적 친밀감을 품었던 것 같다.
이채연 작가는 그 자리에서도 대파에 관한 작업을 발표했다. 흔하고 싸고 필수적인 재료인데다 이런저런 예술적 서사를 가진 대파에 대해 설명했다. 그날 영상예술 세미나 팀의 발표재료? 였던 통배추를 부상으로 받아 품에 안고 집에 갔던 걸로 기억한다.
두 종류의 작가가 있다. 생활분리형 작가와 생활밀착형 작가가 있는데 이채연 작가는 확연하게 후자에 속한다.
그의 작풍은 때로는 무척 섬세하고 때로는 초현실주의이고 어느 때엔 쏘 심플 그 자체이지만 내용만큼은 구체적인 희노애락을 담고 있다. 오늘에서 출발한 바램이 깃들어있으며 생활에 단단하게 붙어있다. 작가는 작품에 거창한 철학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채연 작가의 그림 속에는 작가의 세속적 바램, 볼 통통 사내아이, 친정엄마에 대한 복잡한 심경, 심지어 살고 있는 고장의 특산품까지. 모든 미학은 무지개 풍선이 둥둥 뜬 하얀 구름 속에서도 제 나름의 실존적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채연 작가는 한예종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유리공예를 했다. 유리로 만든 사랑니 왕관(제목;나의 오춘기를 위한 상)과 붉은 실에 꿰인 사랑니 목걸이(제목;살아남은 자의 전리품)는 졸업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개념에 조형적으로도 썩 매력적인 결과물이었으며 교수의 흐뭇한 기대도 받았지만 유리는 이제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종과 조형학과 특성상 흔치않게 유리를 배울 수 있고 비싼 장비들을 이용 가능하다는 동기가 컸을 뿐 유리작가로 계속 갈 수는 없겠다고 판단했단다. 단순히 작가적 변덕은 아니었던 게 유리작업의 어마어마한 장비를 다루기 위해서는 규정이 지나치게 많고 협업의 필요성도 아주 크다. 솔리스트의 기질이 다분한 그에게는 그 부분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학교를 떠나서는 그만한 장비를 갖춘 작업실을 마련할 수 없었다. 이렇게 현실은 작품의 방향을 지배했다.
2000년대 중반, 대학 졸업 후 생계에 도움이 될 직업을 찾던 이채연 작가는 제빵사가 되어 단내 가득 빵을 구웠고 남대문 공예상가에서 일했다. 귀금속 왁스작업을 하거나 스카프 회사에 디자이너로 출근하기도 했다. 그 시절 친구와 함께 이문동 방 두 칸짜리 집에 세 들어 살면서 큰 방은 작업실로 쓰고 작은방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뭔가를 끄적였다.
이때 작가의 스케치북에서는 퇴근한 직장인 대파가 빨간 구두를 벗어던지고 핸드폰 보며 늘어졌고 화이삼!을 외치는 대파는 자주 등장했다. 도리 없는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고 싶을 때엔 대파의 도마 위 처단식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 때 만큼은 대파는 작가 자신을 벗어난 대상이었고 어두운 내면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에는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미로 복?을 기원하는 부적을 그렸다. 파를 그렸다가 부적을 그렸다가 파와 부적을 포개 넣어 그렸다가.
이후 < 부적을 그려드립니다 > 라는 전시를 열어 이채연 작가는 한복을 차려입고 전시장 가운데에 상을 펴고 앉아 부적을 그려주는 퍼포먼스를 했다. 당시 사뭇 집중한 관객의 모습을 보면 '기원'을 넣어 그리는 사람이나 '기원'을 실체로서 간직하려는 사람이나 염원의 질량은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적을 그리러 가서 파 한 다발을 마치 꽃다발처럼 리본 묶어 소중하게 안고 있었어요. 내 파가 근사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얘 사실 하찮은 애가 아니다, 천 원짜리이지만 알고 보면 우아한 아이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이채연 작가는 그리 늦지 않은 나이에 '취집'했다. 그의 남편은 아내에게 쓴 소리 바른 소리 오만 소리 다 하지만 정작 가족의 바람에 자신의 삶을 맞추는, 그야말로 츤데레 이다. 타자인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신혼시절엔 남편은 스마트하고 나름대로 '도전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고 당시에 다녔던 기업은 시간 관계없이 달려가야 할 업무의 종류가 많았다. 부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으리라 본다. 남편의 선택에는 저녁이 있는 삶 속에서 부모가 함께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의지가 더 크게 작용 되었다. 그리하여‘안정 보장’ 공공기관에 이직하여 칼퇴를 이루었으며 오늘날 진천에까지 이주하게 되었다.
이채연 작가의 작업실(방)은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적으로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인 집 안에서 크고 작게 머물렀다. 보통 작가의 작업실이 중요한 이유는 마치 작품의 몰드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크기는 작업실 평수에 비례하여 결정되고 기법도 환경에 맞추어진다.
미혼 시절 일터에서 지쳐 돌아온 작가는 책상 자리에서 한잔 홀짝이며 대파며 부적을 드로잉 했고 결혼하고 나선 아이를 재운 시간 조용한 식탁에 앉아 엄마의 꿈이 날아다니는 진천의 구름을 그렸다. 일과를 마친 밤이 되면 소담한 '자신만의 방'에서 그제야 자유로이 부유했다.
누군가들처럼 본격적으로 판을 벌리지는 못했지만 손에서 놓아본 적은 없다. 비장한 방향성은 없었지만 작가의 시간 구절 곡절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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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채연작가의 개인전을 두 번 관람했다. 2021년 청주 시립 오창관에서의 < 엄마에게 >라는 전시와 2023년 종로 갤러리 175 에서의 전시 < 이것은 파가 아니다 >.
< 엄마에게 >에서는 단계의 정립과 동시에 한 시절의 마무리를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는 풀어내야 할 어떤 숙제 같은 전시였다고 말했다. 그는 엄마의 삶에서 이미 자신의 일부이거나 혹은 곧 바통을 넘겨받아야 할지도 모를 고단함을 천천히 발견해왔다. 그러나 어느 삶 속엔들 나름의 빛남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채연 작가가 부르는 '엄마'는 그의 친정엄마이자 엄마가 된 자신이자 세상에 가득 존재하는 보편적인 엄마들일 것이다. 작가는 내내 무엇을 받아들였으며 이제는 그 자리에 서서 누구에게, 어떤 위로를 하고 싶었을까?
그로부터 이년 뒤 < 이것은 파가 아니다 >에서는 에세이를 담은 아트북의 원화와 애니매이션 등이 전시되었고 나는 이채연작가의 변곡점을 보았다.
이전의 전시는 결혼 후 한동안 작업했던 민화나 한지 작업 등의 영향을 받은 아날로그적인 방향성의 작품들이었다면 이제는 디지털이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채연 작가는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매체변화에 조금 더 적극적이 되었다.
"나는 환경적인 측면에서. 뭔가 쌓이는 것을 축적이 아니라 눌림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에요. 여행을 가도 계란 식빵 스케치북 한장정도만 있어도 너무 편안하게 삶이 살아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고 뭔가 표현하고 싶은데 내가 너무 미술재료에 파묻혀 살았구나 싶었어요. 근데 또 누가 좋다고 하면 이것도 사고 또 저것도 사고 그게 너무 스트레스인거야. 어느 순간 이 노마드 세상에 스스로를 아날로그 인간으로서 묶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쯤부터 매체를 조금씩 달리 해보기 시작한 거죠."
이를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한 계기는 있었다. 기본적인 포토샵만 간신히 할 줄 알던 이채연 작가에게 다원예술을 하는 작가와 협업하는 기회가 생기면서 디지털 회화나 영상 작품도 만들어보게 되었고 어려웠던 경험은 일부분 작가의 새로운 자양분이 되었다.
"한지 그림을 그리던 시절에는 아이가 조금 크고 이제 막 작업을 다시 시작하던 시점이라서 최대한 보여주고 싶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아 보여서 부담스럽고 싫어지는 게 있었어요. 그것 또한 ‘눌림’의 일종이었던 거죠.
이래저래 디지털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여러 가지 시도해보고 있는데 이제는 이것에 또 너무 얽매여서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
변화하는 만큼 가벼워졌고 그만큼 넓어졌다.
얼마 전 이채연 작가가 출간한 < 알록달록 돌하르방 > 동화책과 < 이것은 파가 아니다 >에세이를 선물 받았다. 도서 박람회에도 부스를 꾸려 자신의 책들을 선보이고 왔다고 했다. 이채연표 대파 굿즈도 여럿 상품화 되어 나왔다. 나도 < 파 봉다리 가방 > 하나 샀다.
"흘러 가는대로 가보려고 해요. 지금 벌려놓은 거는 그냥 이대로 유지하고 뭔가가 마음에 들어오면 또 그때그때 생각해 보는 거죠."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이 있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리라고 말했다. 예고한 백년 후가 되었다. 실제로 그녀의 예언대로 여성들의 처지는 천지가 개벽하게 변했다. 그러나 생물학적 적합성을 근거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부분이 있으니 '엄마' 라는 점일 것이다. '엄마'에 합당한 사회적 기대까지 덤으로.
이채연 작가가 엄마이거나 요리를 하는 주부이기에 대파를 매개체로 삼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것이 성장기 시절을 통해 정물로서 입력되었고 이후에도 주변에 널려있었으며 생활을 예민하게 바라보는 작가에게 오브제의 하나로서, 그리고 그것이 그리기에 썩 좋았기에 선택 되었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여성'이라는 하나의 큰 조망이 형성되었지만. 나는 궁극적으로는 '엄마'로서의 상징이나 '여성인' 작가로서만 이채연이나 그의 작품이 소비되지 않았으면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그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다양한 역할의 하나일 뿐 전체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우주 속의 이채연은 대파의 미끈하면서도 절도 있게 꺾이는 실루엣이 좋았고 일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물을 사군자처럼 간지 나게 표현해주고 싶었다. 어느 순간 대파와 손을 잡고 함께 꽤 오래 그리고 앞으로도 재미나게 놀고 있을, 엄마도 맞고 여성도 맞지만 일단 그냥 이채연.
내가 만난 이채연은 위트 있고 섬세한 듯 연약한 듯 꽤나 뚝심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만들어낸 세상 안에는 뭔가 재미난 게 많아서 퍽 '파‘며들고 있다.
한지운 (미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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