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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이채연, 그의 방에 '파'며들다_시방아트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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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별것도 아니어 보이는 경험이 당사자만이 잡아낼 수 있는 어떤 신호탄 같은 것이 되어 인생의 중요한 디딤돌로 작용할 때가 있다. 그날 대파의 푸른 손짓이 이채연 작가에겐 그랬던 것 같다.
“우리 어릴 때 밖에서 막 놀다가 집에 돌아가는 시간 있잖아요. 하늘이 슬 빛 바래지고 찌개 보글보글하고 밥 짓는 냄새가 골목에 풍기기 시작하는 시간. 우리 아가가 아직 내 품에 쏙 들어오던 때였어요. 나는 참 좋았어요. 아기랑 딱 붙어있을 때의 그 꽉차는 만족감. 지금도 그건 그리워요."
그 날도 아기띠로 어린 아들을 앞으로 메고 들쳐 메고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단다.
어라 저 앞에 작가와 닮은 여자가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묘하게 나 같았어요. 머리는 대충 틀어 올리고 옷도 뭔가 비슷하게 입었고...... 아무튼 분위기가!"
어딘가로 바삐 종종종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예사롭게 보는데 별안간 그녀의 손에 들린 봉지 속의 대파가 뒤를 돌아보며 인사를 하더란다.
"맞아요. 까만 봉다리에서 저 하나만 삐쭉 나와서는 명랑하게 나 여기 있어- 하고 말을 하는 거예요. 진짜 이상하죠. 파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멀거니 쳐다보다 보니 여자도 여자지만 대파가 꼭 나처럼 느껴졌어요. 정해진 시간이 되면 부엌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12시의 신데렐라처럼. 나와 닮은 저 바쁜 여자나 우리 엄마처럼. 그리고 아기를 업고 있는 나처럼"
회화계열 미술입시를 겪어본 사람들에게 파는 매우 친숙한 정물이다. 우리는 파를 식자재가 아니라 오브제로서 먼저 접했다. 이채연 작가는 유독 대파를 잘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 '만만'했을 것이다. 게다가 생김새를 보라. 난초처럼 우아하게 ㄱ자로 접히기까지 한다. 일필휘지에 환상이 있고 생활과 작품이 긴밀히 연결되는 작가의 특성상 파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건 인과관계가 명확해 보인다.
그날 이었다. 수월하게 가져다 쓰던 파가. 그러나 그 파가 말을 건넨 어느 날 오후, 파는 이채연 작가만의 메타포로 확실하게 걸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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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채연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약 사오년 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동부창고가 콜라보로 예술 교육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우리는 참여 예술가였다.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던 중 우리가 같은 지역민(진천)인데다 서울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낯선 충북 땅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던 나는 그것만으로도 일방적인 내적 친밀감을 품었던 것 같다.
이채연 작가는 그 자리에서도 대파에 관한 작업을 발표했다. 흔하고 싸고 필수적인 재료인데다 이런저런 예술적 서사를 가진 대파에 대해 설명했다. 그날 영상예술 세미나 팀의 발표재료? 였던 통배추를 부상으로 받아 품에 안고 집에 갔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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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작가가 있다. 생활분리형 작가와 생활밀착형 작가가 있는데 이채연 작가는 확연하게 후자에 속한다.
그의 작풍은 때로는 무척 섬세하고 때로는 초현실주의이고 어느 때엔 쏘 심플 그 자체이지만 내용만큼은 구체적인 희노애락을 담고 있다. 오늘에서 출발한 바램이 깃들어있으며 생활에 단단하게 붙어있다. 작가는 작품에 거창한 철학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채연 작가의 그림 속에는 작가의 세속적 바램, 볼 통통 사내아이, 친정엄마에 대한 복잡한 심경, 심지어 살고 있는 고장의 특산품까지. 모든 미학은 무지개 풍선이 둥둥 뜬 하얀 구름 속에서도 제 나름의 실존적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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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연 작가는 한예종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유리공예를 했다. 유리로 만든 사랑니 왕관(제목;나의 오춘기를 위한 상)과 붉은 실에 꿰인 사랑니 목걸이(제목;살아남은 자의 전리품)는 졸업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개념에 조형적으로도 썩 매력적인 결과물이었으며 교수의 흐뭇한 기대도 받았지만 유리는 이제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종과 조형학과 특성상 흔치않게 유리를 배울 수 있고 비싼 장비들을 이용 가능하다는 동기가 컸을 뿐 유리작가로 계속 갈 수는 없겠다고 판단했단다. 단순히 작가적 변덕은 아니었던 게 유리작업의 어마어마한 장비를 다루기 위해서는 규정이 지나치게 많고 협업의 필요성도 아주 크다. 솔리스트의 기질이 다분한 그에게는 그 부분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학교를 떠나서는 그만한 장비를 갖춘 작업실을 마련할 수 없었다. 이렇게 현실은 작품의 방향을 지배했다.
2000년대 중반, 대학 졸업 후 생계에 도움이 될 직업을 찾던 이채연 작가는 제빵사가 되어 단내 가득 빵을 구웠고 남대문 공예상가에서 일했다. 귀금속 왁스작업을 하거나 스카프 회사에 디자이너로 출근하기도 했다. 그 시절 친구와 함께 이문동 방 두 칸짜리 집에 세 들어 살면서 큰 방은 작업실로 쓰고 작은방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뭔가를 끄적였다.
이때 작가의 스케치북에서는 퇴근한 직장인 대파가 빨간 구두를 벗어던지고 핸드폰 보며 늘어졌고 화이삼!을 외치는 대파는 자주 등장했다. 도리 없는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고 싶을 때엔 대파의 도마 위 처단식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 때 만큼은 대파는 작가 자신을 벗어난 대상이었고 어두운 내면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 또 어느 날에는 당시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미로 복?을 기원하는 부적을 그렸다. 파를 그렸다가 부적을 그렸다가 파와 부적을 포개 넣어 그렸다가.
이후 < 부적을 그려드립니다 > 라는 전시를 열어 이채연 작가는 한복을 차려입고 전시장 가운데에 상을 펴고 앉아 부적을 그려주는 퍼포먼스를 했다. 당시 사뭇 집중한 관객의 모습을 보면 '기원'을 넣어 그리는 사람이나 '기원'을 실체로서 간직하려는 사람이나 염원의 질량은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적을 그리러 가서 파 한 다발을 마치 꽃다발처럼 리본 묶어 소중하게 안고 있었어요. 내 파가 근사하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얘 사실 하찮은 애가 아니다, 천 원짜리이지만 알고 보면 우아한 아이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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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연 작가는 그리 늦지 않은 나이에 '취집'했다. 그의 남편은 아내에게 쓴 소리 바른 소리 오만 소리 다 하지만 정작 가족의 바람에 자신의 삶을 맞추는, 그야말로 츤데레 이다. 타자인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신혼시절엔 남편은 스마트하고 나름대로 '도전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고 당시에 다녔던 기업은 시간 관계없이 달려가야 할 업무의 종류가 많았다. 부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으리라 본다. 남편의 선택에는 저녁이 있는 삶 속에서 부모가 함께 아이를 키우고자 하는 의지가 더 크게 작용 되었다. 그리하여‘안정 보장’ 공공기관에 이직하여 칼퇴를 이루었으며 오늘날 진천에까지 이주하게 되었다.
이채연 작가의 작업실(방)은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적으로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인 집 안에서 크고 작게 머물렀다. 보통 작가의 작업실이 중요한 이유는 마치 작품의 몰드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크기는 작업실 평수에 비례하여 결정되고 기법도 환경에 맞추어진다.
미혼 시절 일터에서 지쳐 돌아온 작가는 책상 자리에서 한잔 홀짝이며 대파며 부적을 드로잉 했고 결혼하고 나선 아이를 재운 시간 조용한 식탁에 앉아 엄마의 꿈이 날아다니는 진천의 구름을 그렸다. 일과를 마친 밤이 되면 소담한 '자신만의 방'에서 그제야 자유로이 부유했다.
누군가들처럼 본격적으로 판을 벌리지는 못했지만 손에서 놓아본 적은 없다. 비장한 방향성은 없었지만 작가의 시간 구절 곡절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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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채연작가의 개인전을 두 번 관람했다. 2021년 청주 시립 오창관에서의 < 엄마에게 >라는 전시와 2023년 종로 갤러리 175 에서의 전시 < 이것은 파가 아니다 >.
< 엄마에게 >에서는 단계의 정립과 동시에 한 시절의 마무리를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는 풀어내야 할 어떤 숙제 같은 전시였다고 말했다. 그는 엄마의 삶에서 이미 자신의 일부이거나 혹은 곧 바통을 넘겨받아야 할지도 모를 고단함을 천천히 발견해왔다. 그러나 어느 삶 속엔들 나름의 빛남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채연 작가가 부르는 '엄마'는 그의 친정엄마이자 엄마가 된 자신이자 세상에 가득 존재하는 보편적인 엄마들일 것이다. 작가는 내내 무엇을 받아들였으며 이제는 그 자리에 서서 누구에게, 어떤 위로를 하고 싶었을까?
 
그로부터 이년 뒤 < 이것은 파가 아니다 >에서는 에세이를 담은 아트북의 원화와 애니매이션 등이 전시되었고 나는 이채연작가의 변곡점을 보았다.
이전의 전시는 결혼 후 한동안 작업했던 민화나 한지 작업 등의 영향을 받은 아날로그적인 방향성의 작품들이었다면 이제는 디지털이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채연 작가는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매체변화에 조금 더 적극적이 되었다.
"나는 환경적인 측면에서. 뭔가 쌓이는 것을 축적이 아니라 눌림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에요. 여행을 가도 계란 식빵 스케치북 한장정도만 있어도 너무 편안하게 삶이 살아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그림을 그리고 싶고 뭔가 표현하고 싶은데 내가 너무 미술재료에 파묻혀 살았구나 싶었어요. 근데 또 누가 좋다고 하면 이것도 사고 또 저것도 사고 그게 너무 스트레스인거야. 어느 순간 이 노마드 세상에 스스로를 아날로그 인간으로서 묶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쯤부터 매체를 조금씩 달리 해보기 시작한 거죠."
이를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한 계기는 있었다. 기본적인 포토샵만 간신히 할 줄 알던 이채연 작가에게 다원예술을 하는 작가와 협업하는 기회가 생기면서 디지털 회화나 영상 작품도 만들어보게 되었고 어려웠던 경험은 일부분 작가의 새로운 자양분이 되었다.
"한지 그림을 그리던 시절에는 아이가 조금 크고 이제 막 작업을 다시 시작하던 시점이라서 최대한 보여주고 싶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아 보여서 부담스럽고 싫어지는 게 있었어요. 그것 또한 ‘눌림’의 일종이었던 거죠.
이래저래 디지털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여러 가지 시도해보고 있는데 이제는 이것에 또 너무 얽매여서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
변화하는 만큼 가벼워졌고 그만큼 넓어졌다.
 
얼마 전 이채연 작가가 출간한 < 알록달록 돌하르방 > 동화책과 < 이것은 파가 아니다 >에세이를 선물 받았다. 도서 박람회에도 부스를 꾸려 자신의 책들을 선보이고 왔다고 했다. 이채연표 대파 굿즈도 여럿 상품화 되어 나왔다. 나도 < 파 봉다리 가방 > 하나 샀다.
"흘러 가는대로 가보려고 해요. 지금 벌려놓은 거는 그냥 이대로 유지하고 뭔가가 마음에 들어오면 또 그때그때 생각해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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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이 있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리라고 말했다. 예고한 백년 후가 되었다. 실제로 그녀의 예언대로 여성들의 처지는 천지가 개벽하게 변했다. 그러나 생물학적 적합성을 근거로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부분이 있으니 '엄마' 라는 점일 것이다. '엄마'에 합당한 사회적 기대까지 덤으로.
이채연 작가가 엄마이거나 요리를 하는 주부이기에 대파를 매개체로 삼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것이 성장기 시절을 통해 정물로서 입력되었고 이후에도 주변에 널려있었으며 생활을 예민하게 바라보는 작가에게 오브제의 하나로서, 그리고 그것이 그리기에 썩 좋았기에 선택 되었다고 본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여성'이라는 하나의 큰 조망이 형성되었지만. 나는 궁극적으로는 '엄마'로서의 상징이나 '여성인' 작가로서만 이채연이나 그의 작품이 소비되지 않았으면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그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다양한 역할의 하나일 뿐 전체가 될 수 없다. 하나의 우주 속의 이채연은 대파의 미끈하면서도 절도 있게 꺾이는 실루엣이 좋았고 일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물을 사군자처럼 간지 나게 표현해주고 싶었다. 어느 순간 대파와 손을 잡고 함께 꽤 오래 그리고 앞으로도 재미나게 놀고 있을, 엄마도 맞고 여성도 맞지만 일단 그냥 이채연.
내가 만난 이채연은 위트 있고 섬세한 듯 연약한 듯 꽤나 뚝심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만들어낸 세상 안에는 뭔가 재미난 게 많아서 퍽 '파‘며들고 있다.
 
 
한지운 (미술작가)
 
2023 이것은 파가 아니다_이채연 개인전_갤러리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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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 주부, 그리고 파입니다
 
얼마 전, 나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생명의 신비와 모성에 관한 기쁨과 고민과는 별개로, 출산 전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 ‘출산 후에 경력이 단절되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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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름달이 열 번 뜨고 출산을 하고 나서, 바로 다음 고민이 시작되었다.
: ‘일을 할 때, 아기 엄마인 걸 알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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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낳기 전에는 내 삶은 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예술 전시를 기획하고 예술에 대해 글을 쓰는 직업은 사실 삶과 별개로 돌아가지 않는다. 전시를 보고 기획하는 일에 업무시간과 여가시간은 딱히 구분되지 않았고, 머릿속은 언제나 전시와 예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일과 관련되든, 그렇지 않든, 어울리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예술가나 큐레이터 등 예술 관련 종사자였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 중 하나는, 아기를 가진 엄마 예술가나 큐레이터가 육아 이야기를 열띠게 하거나 육아 때문에 업무 시간을 조정할 때 조금도 그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으려 했던 나의 태도이다. 또한 그들의 ‘날 서지 않은 감각’을 은근히 얕보기도 하였다. 지금 와 고백하자면,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사죄라도 하고 싶다.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서 중심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계는 확장되고, 에너지는 배분된다. 즉, ‘잠시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출산과 육아를 경험한 여성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확장된 관찰 대상과 변화하는 관점 등은 비평가의 관점에서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여성이 아니면, 출산이나 육아를 경험하지 않으면 경험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감각들이 예술로 표현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채연 작가는 자신을 ‘파’라고 지칭한다. 그녀는 파이지만 파가 아니기도 한다. 이건 무슨 말일까? 파는 한국적이면서 대중적인 식자재이다. 그리고 흔히, ‘아줌마’로 통칭되는 주부들에게 가장 친숙한 오브제(!)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서 파이지만 파가 될 수 없는 애통함이 비롯된다. 파는 그냥 파인데, 파는 마트에서 살 수 있고 밭에서 재배되어 왔을 뿐인데 우리는 파를 오브제라고 지칭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파는 파가 될 수 없다.
이채연 작가는 입시 시절 수채 정물화를 그릴 때 파를 가장 잘 그렸다고 한다. 그렇게 파는 이채연 작가의 스킬을 입증하고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그림 대상이 되었다. 이후에 작가는 한국 미술대학 중에서 가장 아방가르드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입시미술에서 익혔던 스킬 위주의 작업은 더 이상 현대미술의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동시에, 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시 파는 그녀의 삶과 먹거리와 반찬과 국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결혼-살림-육아라는 종합세트가 삶으로 찾아온다. 아기를 들춰업고 파 봉다리를 손에 든 자신을 종이봉투에 넣은 바게트를 든 파리지앵에 대입하며, 그녀는 다시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찾아 나선다. 바로 여기에 한국(혹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여성 작가들의 2차 자아가 발현된다. 잃어버린 예술가의 자아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엄마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살림하는 주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리서치이다.
 
출품작 < 내 그림의 집 >에 등장하는 집이 있다. 여기에는 < 엄마에게 >라는, 전작이 확장되고 변주된 결과물이다. 이 작업이 출품되었던 이전 전시의 가장 큰 주제는 ‘엄마’이다. 작가 이채연의 엄마에게 바치는 작업에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희망,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점이 모두 뒤섞여 있다. 이 그림은 따뜻하지만 쓸쓸하고, 바나나와 칠면조의 맛을 표방하지만, 실은 파의 맛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작가의 엄마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희생적이고 행운이 따르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한 장의 그림으로 어루만진다. 그림과 같은 집에 어여쁜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다. 마치 성모마리아와 같은 그윽한 자세로. 부엌에는 바나나가 놓여 있고 칠면조가 오븐에서 익어간다. 건담, 목마와 같은 아름다운 장난감이 바닥에 있다. 벽에는 엄마가 취미로 놓은 자수 그림이 걸려 있다.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림인가. 초가집을 수 놓은 자수는 작가가 어린 시절 서랍에서 발견한 엄마의 습작이다. 엄마도 만들고 그리는 일을 하고 싶었구나. 나처럼. 다른 예술가처럼, 엄마에게도 자신을 표현하고 창작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구나. 바나나는 오빠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 사달라고 졸랐던 과일이지만 비싸서 먹을 수 없었던, ‘그림 속의 과일’이다. 칠면조는 작가가 꿈꾸는 만찬이다. 장난감과 엄마의 의상 역시, 상상으로 각색된 엄마의 과거이다. 여기까지는 작가의 뿌리, 엄마에 대한 노스텔지어와 연민의 감정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파’이다. 짐작하다시피, ‘이것은 파가 아니다’는 르네 마그리트의 < 이미지의 배반 > 작품 속 문구,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에서 비롯되었다. 르네 마그리트는 이미지는 실재를 대체할 수 없으므로, 파이프 그림은 파이프가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채연의 그림에 등장하는 파는 작가의 자아를 대변하는, 일종의 ‘페르소나’이다. 파는 다양한 모습으로, 삶과 그림에 등장한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검은 비닐봉지 안에 파가 있다. 미인도 병풍에도 파가 있고, 팜므 파탈을 꿈꾸며 도발하는 파, 인사하다가 뻑큐!를 날리는 파가 있다. 여기서 파는 작가 그 자체이면서 파의 정체성에 이입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식재료이면서, 어디서나 잘 자라나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파는 이채연 작가 자체이다.
 
이번 전시는 아트북을 근간으로 진행되는 전시라는 특징을 갖는다. 아코디언 북의 형태로 펼쳐지는 < 이것은 파가 아니다 >라는 아트북에는 작가의 이야기와 파의 그림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왜 파로부터 시작되는가? 왜 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물음과 답변이 짤막한 글과 산문의 형태로 실려 있다. 입시미술 시절 그린 파에서부터 시작해 아기 엄마가 되면서 마트 장바구니에 담긴 파, 자화상과 살림, 그리고 엄마에 대한 이야기와 현재 살고 있는 진천에서 진행된 민화 시리즈까지, 기존 작업이나 전시에서는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작가의 스토리와 궤적이 담겨 있다. 아코디언 아트북은 작가의 그런 이야기의 구석들이 조근조근 펼쳐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또한 이채연 작가가 늘 찾고 헤매고 있던 예술가의 자아를 찾아 나서는 단초가 될 것이다. 작가는 예술가로서 드로잉, 디지털페인팅, 영상, 퍼포먼스, 민화 등 다양한 장르의 실험을 지속해 왔다. 그리고 ‘파’라는 대단히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페르소나를 선정하여 그 안에서 숨겨진 예술가의 자아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전 전시에서는 자신의 뿌리(엄마), 이번 전시에서는 자신 그리고 앞으로 전시에서는 열매(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계획 중이다. < 내 그림의 집 >(2D 애니메이션, 3분, 2023)이 작가 과거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면, < 이것은 파가 아니다 >(책, 2023)는 현재의 바라보기를 형상화한다. 작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 솔직함과 꾸준함은 관심을 받아 마땅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엄마와 주부의 삶을 살고 있는 작가가 예술가의 균형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조숙현 (미술평론가 / 아트북프레스 대표)
 
2021 엄마에게_이채연 개인전_청주시립미술관 오창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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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와, 엄마가 된 나에게 

엄마. 엄마가 직접 되어 보기 전에는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나와 가족들을 위해서 엄마가 어떤 희생을 해왔는지,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솔직히 잘 알지 못했다. 뒤늦게 내가 엄마가 되고 나니 엄마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엄마의 입장이 되어보니 생기는 고민들도 알게 됐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보고 나면 더 깊게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것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가는 길을 이미 한 세대 전에 걸어간 엄마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엄마이자 여성인 창작자로서 당연히 거치게 되는 과정인 것 같다.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개인사적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엄마에 대한 복잡 미묘한 감정(고마움, 답답함, 안쓰러움, 불쌍함 등)은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느끼는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다.
작가 이채연은 한지에 분채를 사용해 민화와 닮은 그림을 그린다. 민화는 정식 그림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린 규범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그림으로, 생활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실용화를 의미한다. 복 받기를 바라는 옛 사람들의 일상과 소망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전까지는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했으나 태어날 아이의 건강을 빌며 아이의 방에 그림을 하나 걸어주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에서 민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민화는 장르의 특성상 창의적인 구성보다는 형식화된 유형에 따라 인습적으로 계승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작가는 2021년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동시대 이미지로 변형하거나 일부 상징만 차용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색을 찾아 나간다.

‘대파’로 표현한 엄마 그리고 나
청주시립미술관 오창전시관에서 열리는 이채연의 개인전 < 엄마에게 >(2021.12.1~14)는 말 그대로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전시다. 30여 점의 작품들은 크게 몇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볼 수 있는데, 엄마가 된 나의 모습, 엄마와 나의 공통된 소망인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염원, 자유에 대한 갈망,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향의 실현,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 등을 작품에서 읽을 수 있다.
이채연의 작품은 가장 먼저 엄마가 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의 작품에는 대파를 그린 작품들이 꽤 있다. 미대 입시를 하면서 줄곧 그렸던 파. 작가는 미대에 진학하고 혼자 서울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 비교적 저렴한 식재료인 파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많은 음식에 약방의 감초처럼 쓰임이 많은 파는 주재료는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될 그런 부재료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마트에서 파를 구입해서 가는 사람은 기혼자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됐고, 작가 자신의 상징으로 파를 그리기 시작했다. < 자화상 >(2021)에서는 아무런 배경 없이 파 한 대가 그려져 있다. 마치 사진관에서 찍은 증명사진처럼 양팔을 가지런히 늘어뜨린 파는 여리면서도 동시에 단단한 모습을 드러낸다.
< 학교갔다 돌아오니 엄마가 ^^얼굴로 맞아 주셨다 >에서는 엄마 역시 파로 표현됐다. 대의 끝부분이 꺾어져 마치 눈웃음을 표현하는 이모티콘 ^^ 과 닮은 모습이다. 파로 장식된 도자기에 한 떨기 꽃송이처럼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습이 해학적으로 느껴진다. < it’s your turn >은 빨간 고무장갑에 대파가 가로로 잡혀 있는 모습이다. 작가의 모친이 결혼한 자신을 쳐다보는 표정이 마치 바톤을 넘겨주는 이어달리기 주자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파로 분한 엄마 혹은 작가 자신의 모습은 여러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발광하는 광물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파를 그린 < 주목받고 싶은 파 >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무대의 중심에 있지 못한 어떤 존재가 사람들의 관심 받고 싶은 숨겨진 욕망을 드러낸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염원
< 가족을 위한 축복 >(2021)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가정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업이다. 수박이나, 복숭아 등 몇몇 과일이 한데 모여 있고, 그 주변을 기다란 대파가 하트모양으로 둘러싼 모습이다. 각기 다른 크기와 종류의 과일은 평온한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 이채연의 작품에는 초현실적인 특성이 도드라진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자신의 내면에서 보이는 것을 뚜렷하게 그려내는 화풍 중 하나로, 무의식이나 꿈, 환상의 세계를 현실세계보다 더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더욱 신비감을 나타내는 특성을 가진다. 이채연이 그린 대상 하나하나는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지만, 배경과 함께 그 전체를 보게 되면 어딘지 모르게 가짜 같기도 하고, 이성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Sweet Home >과 < 걸어두면 좋을 것 같아 그린 그림 >은 그림 안의 그림 같은 액자 구성을 가진 작품으로, 작가의 세 가족, 남편과 자신과 아들을 상징하는 세 개의 알이 중앙에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전통과 현재, 동양과 서양적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뒤얽혀 있는데, 이러한 이질적인 도상들의 혼용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낯설고, 키치(Kitsch)적으로 느껴진다. 키치란 고미술품을 모방한 가짜 복제품, 유사품, 통속미술작품을 의미하는데, 조악한 감각으로 만든 미술품이나 대중 취향의 대중문화를 지칭한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 부귀영화를 바라는 내용처럼 느껴지는데, 봉황이나 날개, 쌀밥, 연꽃, 하트, 장미 등 각각 다른 배경에서 사용된 상징들이 한 화면에 어우러지면서 그것이 현실이 아닌 이상향임을 강조하며 화려한 표면 뒤의 씁쓸함 같은 것들을 상상하게끔 한다.

자유를 향한 갈망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우울증을 겪는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새 생명을 만나게 된 기쁨과 함께, 아이가 없던 시절의 삶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삶의 모든 부분이 아이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혼자서 보내는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아이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거나 필요한 것을 구입하거나 청소를 비롯한 각종 집안일을 하면서 배우자와 아이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트 오픈 기념 풍선을 본 작가는,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상태로 하늘을 훨훨 나는 풍선을 보고 자유를 갈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언급했다. 외조모와 모친, 그리고 자신, 3대에 걸친 세 여자가 함께 여행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을 떠올리며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결국은 떠날 수 없는 운명을 표현했다.
< 엄마 미투하시고 여행을 떠나요 >에서는 바구니에 가지런히 담은 파 한 단에 셀 수 없이 많은 분홍 풍선을 매달아놓았다. < 기억 >에는 새장 안에 갇히지 않은 대신 그 바깥에서 평화롭게 앉아있는 새를 그렸고, < 모녀 >에서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젊은 시절의 모친과 작가 자신의 모습을 함께 그렸다. 무지갯빛의 식물 뒤로 어렴풋이 보이는 모녀의 모습은 자못 행복해 보인다. 분명히 밝은 색채로 웃는 모습을 담고 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서글픈 느낌을 준다.

엄마의 이루지 못한 소원
전시의 제목과 동명의 작품인 < 엄마에게 >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가장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작품인 것 같다. 작가의 모친은 남편의 잦은 외도로 오랜 기간 고통받아왔으며, 아들이 병마와 싸우고 있는 상황에 있다. 가족을 위해 인내하고, 보살피는 일에 매진하면서 많이 지쳐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가족을 위한 걱정을 하며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다. 자녀가 좋아하는 맛있는 반찬을 싸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 좋은 장난감을 때때마다 사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값비싼 과일을 때마다 먹이지 못한 미안함 등 모친의 소회를 지속적으로 들으며 성장해 온 작가는 모친의 못 이룬 소원을 작품에서라도 이뤄주고자 이러한 그림을 그렸다. 집안에서 모친의 유일한 휴식처가 되었던 부엌은 잡지에서 찾아 최신식으로 그렸고, 오븐에는 멋진 칠면조가 구워지고 있으며, 창밖에는 석류나무와 장독대가 있고, 한 구석에는 모친이 수놓던 작업이 완성되어 걸려있으며, 바나나와 멋진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다. 흔들의자에 앉아 주름이 많은 분홍 원피스를 입고, 아기를 품에 안고 있다.
< 엄마에게 >는 영국 팝아트 작가인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의 <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 >(1956)을 떠올리게 한다. 평범한 가정의 거실 모습을 대중문화에서 오려낸 각종 이미지들로 콜라주한 작품이다. 해밀턴의 작품이 익명의 존재들로 채워진 소비지향주의 사회의 한 모습이었다면, 이채연의 작품은 자신의 가족과 그들의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들로 채운 이상향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세폭화(Triptych)로 제작해 병풍으로 만든 작품 < 엄마의 방 >이 있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면 병풍을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던 소원대로 이런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 중앙에는 병풍 안의 또 다른 병풍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탈북자 집의 장롱 문양에서 따온 것으로 오리, 학, 소나무 등이 어우러진 모양이다. 장롱의 오른쪽 위에는 “사랑하는 딸아 씩씩하고 건강하게 살아라”라고 적힌 돌에 글씨를 새긴 관광 상품이 무심하게 놓여있고, 왼쪽에는 대파와 양파가, 오른쪽에는 진귀한 화분들이 그려졌다.

나의 엄마와 엄마가 된 나에게
작가가 자신의 모친에게 전하고자하는 말에서 시작된 지극히 개인적 서사를 담은 이 전시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채연의 작품과, 그가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행위 그 자체는 배우자와 자녀를 위해 보이지 않는 헌신과 희생으로 가족을 지탱해나가는 우리 시대의 모든 엄마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글: 최정윤(독립큐레이터)

2019 Especially for you_이채연 개인전_스페이스D9

동시대를 그리는 민화, 일상처럼 편안한 풍경

인류가 지구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한 진화는 땅으로부터 손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자연치유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긴 했지만, 그것 또한 자유로워진 손의 힘으로 해결해 왔다. 그리고 인류는 손의 사용을 급속도로 발전시켰고, 손 사용을 방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하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결국, 손은 우리의 정신활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류의 정신세계를 지금처럼 이끌어 온 인류 고유의 신체다. 따라서 우리의 손은 매우 감동적이다.

이채연 작가는 집착하리만큼, 이 감동적인 손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다. 해서 선택한 그리는 방법으로, 민화를 택했고, 그리기와 생각하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 시대에 민화는 정신 수양할 때, 추천을 할 만큼 시쳇말로 노동 집약적인 그림이다. 손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선택한 기법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한 집념과 고통이 수반되는 기법인 것은 작가 스스로도 충분히 깨닫고, 견뎌내고 있는 듯 하다. 민화는 전통적으로는, 누구나 편안하고 쉽게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릴 수 있는 대중화이자 세속화였다. 물론, 전문적인 화원들도 그렸지만, 말 그대로 민화는 민중들의 다양한 희망과 바램 혹은 장식을 위해 그려지고, 소통되어 왔던 그림이다. 따라서 이채연은 무엇을 그리기 위해 이 그리기 힘들고, 지극히 대중적인 민화를 택했을까. 궁금하다.

 우선, 그의 관심사는 이 시대의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다양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꾸리고 있는 가정인 듯 하다.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내는 것이 그 어떤 행복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처럼. 그에게 가정은 가장 소중한 그의 안식처고 도피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소소하게 발견되는 일상의 물건이나 사건들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상상과 창작의 소재로 바뀌고, 작가만의 풍경 혹은 정물로 다시 태어난다. 민화가 사람들의 바램과 소소한 일상을 그려왔었던 우리만의 전통이자 예술적 감수성이었다면, 이채연의 민화는 그 전통을 잘 해석했고, 또한 동시대의 요구를 적절하게 잘 표현하고 창작할 수 있는 그만의 언어다. 그가 인용하는 전통적인 소재와 주제는 여전히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도 많은 부분 상통하고 있다. 상처받은 유년의 기억들을 희망으로 바꾸고, 가정의 복을 기원하고, 사회적 변화를 꿈꾸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삶이 위로를 받기를 기원하는, 그의 민화는 전통적으로 기능해 왔던 민화를 동시대를 표현하는 그만의 민화로 재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퀘렌시아’다. 책가도를 재현한 병풍이다. 책가도는 말 그대로 책을 그려 놓은 민화다. 책이 귀했던 시절에 그림으로라도 집에 책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그대로 그려서 벽에 걸어 놓은 그림이었다. 반면, 이채연의 책가도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다양한 물건들을 책꽂이에 올려 놓았다. 각각의 물건들은 작가의 경험과 바램을 상징하고 있는데, 여기에 작가는 자신의 도피와 안식처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퀘렌시아는 스트레스와 피로를 푸는 공간 혹은 그것을 찾는 경향을 의미하는 스페인어라고 한다. 어린 시절, 다락방을 찾고, 옷장에 숨고, 나무 위에 오두막을 만들어 완벽한 나만의 공간을 찾았듯이 작가의 퀘렌시아는 그의 일상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물건들이 만들어준 상징과 의미였다. 또한, 그의 안식처는 병풍이다. 병풍은 지극히 장식적이면서도 그 뒤에 있는 무엇인가를 감출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장례기간 시신을 안장하던 곳이 병풍 뒤였다는 것, 해서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나누고 때로 그 경계를 이어주는 것이 병풍이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그의 안식처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라는 의미가 없어지고, 지옥과 천당이라는 구분이 필요 없는 어딘가 모를 또 다른 유토피아를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소소한 일상의 물건들이 책가도에서는 규칙적으로 정리되기도 하지만 가끔, 전혀 다른 의미로 구성된다. ‘살림 여왕의 트로피’는 그 정물(살림살이)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다. 물론, 그 정물 역시 가족을 위해 살림을 하다가 발견되는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작가는 거기에 자신을 위해 혹은 가족과 같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이 트로피를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작가는 말한다. 소소한 일상의 정물들에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그것들이 세상에 전하고 싶은 위로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민화다.

이채연 작가는 단 한번도 자신이 엄마라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엄마라면 당연하겠지만, 현 사회의 사건 사고들을 보면 그렇지도 않기에 그에게 엄마로서 돌봄의 행위는 상당히 지극한 것 같다. 그 돌봄을 위한 행위에서 많은 부분, 작업의 주제들이 만들어 진다. 많은 작가들은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어떤 이상향에 대한 고민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일상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이야기 역시 중요한 그림의 소재나 주제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채연 작가는 후자의 경향이 강하다. 그의 엄마로부터 현재, 본인이 엄마가 되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경험과 기억들. 그리고 그것들을 대변하고 상징하고 있는 물건들, 혹은 바램과 기복이 담긴 민화적 풍경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소소하지만 명확하게 분석하고, 재해석하고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민화는 동시대를 기록하고 살짝 비트는 일종의 그림일기다. 딱딱한 언론 매체들을 다루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과연 엄마는 희생일까, 아니면 행복일까. 엄마라는 의미. 가족과 그 가족을 안정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오는 개인적인 고통. 외로움을 감내하고 개인의 자유를 찾는 것. 그 어느 것도 현명한 선택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자신이 세상에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언어가 그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 행위를 통해 삶의 고달픔을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작가는 화려하게 장식된 도자기에 아름다운 모란이나 매화꽃이 아니라 거의 매일 끼니 때마다 다듬었을 파를 꽂았다. 그의 푸르게 싱싱한 파는, 세상을 위트 있게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이면서, 한편으로 삶이란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다.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속에도 매년 꽃은 피고 진다. 작가는 본인의 작품이 별이 되어 스스로 빛나기를 바란다. 그 마음처럼, 산 속의 꽃은 핀다. 그 깊은 산속의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지켜야 하는 꽃의 의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것. 그 자체, 꽃의 축복이기 때문이다. 글: 임대식


Contemporary Korean folk paintings, Comfortable scenery as usual (Brief)

Lee Chae-yeon is an artist who likes to paint with a touching hand as if driven by obsession. Selecting Korean folk paintings as her chosen method, she focuses on painting and thinking. In this age, Korean folk painting is said to be a labor-intensive art that is highly recommended for cultivating mental discipline. Though it was personal predilection that led her to choose the technique of drawing by hand, the technique involves a great deal of attention and pain, which the artist herself seems fully aware of as she endures it.

First, her interests show as much diversity as that shown by the media of this age. Among these, family seems to be most important for her, in which she seems single-mindedly focused on the idea that running a stable family should precede any and all other forms of happiness. To her, the home is the most important place of rest and refuge, and a place in which she seeks out the small everyday objects or events found in it. And through her work these are transformed into various materials of imagination and creation, reborn as landscapes or still lives unique to the artist. If Korean folk paintings are the unique tradition and artistic sensibilities of the people that have portrayed the wishes and small events of daily life of the people, Lee Chae-yeon's Korean folk paintings interpret the tradition well, and serve as her own language to properly express and create contemporary needs. Much of the traditional subjects and topics she quotes remains in common with our lives even now in the present age. Her Korean folk paintings turn hurtful childhood memories into hope, wish for the well-being of the family, dream of social change, and wish for comfort in the lives of the hardworking, and in this way it would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at her Korean folk paintings are works that take the traditional function of a Korean folk painting and reproduce them in her own way to express the contemporary age. 

The artist seems to have never once forgotten that she is a mother. In her works are many experiences and memories from her mother that were discovered in the process of becoming a mother herself. On top of this are the objects that represent and symbolize them, or Korean folk painting landscapes containing the wishes and the ups and downs of life. In this way, the artist analyzes with clarity, reinterprets and focuses on her stories, small though they may be. Her Korean folk paintings are thus a sort of picture that records contemporary times with a slight twist, one able to show our daily life and inability to deal with unfriendly media.

The artist explains her reason for wanting to paint as the stories that she wants to paint for the world, in which painting is the language that can tell them. In addition, she says that through this act we are able to forget about the weariness of life. On gorgeously decorated pottery the artist adds not beautiful peonies and plum blossoms, but green onions that would have been trimmed at every meal of the day. Her fresh green onions are the artist's willingness to see and interpret the world with wit, while giving us a reminder that life is reality itself. (Written by Yim Dea-sik)
 

2018 미련한 그림_이채연 개인전_갤러리 도올

이채연이 그려낸 책장으로 보이는 것들 커튼, 케이크, 마트로시카와 금줄, 달력, 복주머니, 아이 구두 외 다양한 형태들은 멀리서 한눈에 관찰하면 예쁘다, 귀엽다 등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을 하나씩 보고 있으면 이내 그 감정들은 사라지고 왜 이렇게 까지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또 한 작품 '엄마에게’를 보면 부엌 한쪽에 창문 넘어 정원이 보여 일상의 평온함이 있으나 표정을 알 수 없는 여인의 초상으로 그림은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든 복잡한 클리셰가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로 파, 달걀은 단순하게 얘기하면 작가의 분신이다. 파는 입시 때부터 접해왔고 결혼과 함께 가정주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사물은 일상이 전제이다. 아름다운 자태로 선으로 자리하다 이내 시들어 마치 우울하다 말하는 것처럼 만화 속 캐릭터처럼 작품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선보인다. 달걀 역시 안락함을 꿈꾸며 쉬고 있는 모습이지만 주변에 흐르는 자세한 묘사 없이 표현된 것으로 지나간 사건과 현재의 시점이 모호하게 겹친 듯 보인다. 기억속의 감모여재도에서 영감을 받고 시작된 작품들은 일상의 시선이 있으나 서사 없는 경계를 오간다. 사건, 사고를 뉴스로 접하고 때로는 작가의 경험이 포함되 그림들은 장르와 장르를 오가며 예술작품이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 없는 막연한 동경도 없애준다. 매체로서 동양화 안료를 사용하고 있으나 스며듦 이라기보다 색칠됨으로 보이는 서양화 표현에 더 근접하며 화면을 가득 메우는 구도 처리란 초현실에 가깝다. 대학에서 유리를 전공하고 우연히 접한 민화와 뜨개질, 일로서 접한 일러스트는 이 작가에게 하나의 매체로 작품을 완성 짓게 하지 않는 좀 더 다양한 표현을 갔게 했으며 거창하지 않고 약간은 우울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조금은 민감한 문제. 작가의 유년기 시절. 트라우마도 포함된 기억은 극복됨이 아닌 반복되는 현실로서 조심스럽게 얘기하자면 이런 문제가 작품으로 변화한 듯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예술은 관찰되는 사실을 뒤로하고 공간 밖 또 다른 현실, 과거의 주목하기 시작했다. 작품과 함께 텍스트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작품들이 공존하는 동시대 예술이 나오기까지 기나긴 역사적 사건 중 근대시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로 인한 과학발전, 자본주의의 재정립은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인 경향으로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개인이 극복하면 그만이다. 마크로스코, 잭슨폴락, 뒤샹, 프리다칼로, 피카소 등 우리의 기억속에 미술사의 상식처럼 등장하는 유명예술가들의 작품을 떠올리면 정작 조형성 보다 과거사나 주변의 흐르는 역사적 사건이 더 어필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면엔 보통 사람과 비교했을 때 경험 보다는 겪음으로 인한 현상들을 내면과 섞어 작품에 행위로서 강하게 표출 했기에 난해함은 당연하다.
‘하루하루는 존재보다 비존재를 더 많이 품고 있다. 예를 들면 4월 18일 화요일이었던 어제는 실제로 좋은 날이었다. “being"(존재)에서 평균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존재의 순간들」중에서-
    작품 ‘나의 퀘란시아1.2’ 처럼 형태가 명확하게 관찰된다는 점에서 감상자는 그 앞에서 무엇을 전달받을 것 같지만 쉽게 전달받는 내용이란 없다. 책장을 가득 메운 도상들은 시간상 나열이 아닌 서로 관계없는 채움으로 추상에 더 근접한다. 원근법 처리없이 그때의 기억은 개인이 다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서로 자연스레 도상들은 섞인다. 마치 그 옛날 예측 못한 겪음으로 인해 흘렀던 마크 로스코의 작품처럼 나름의 공허함과 숭고가 있다. 강함과 동시에 잔잔하게 흐르는 색채와 더불어 동서양의 키치적 형태 표현은 목적 이라기보다 결론짓지 못하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관찰자의 태도로서 미처 떠올릴 수 없는 가족 간의 관계 그리고 다수와 개인의 관계 형성으로 인한 감정의 오고 감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매일을 살고 각자의 선택된 방식의 삶이 있지만 늘 한결같지 않음을 안다. 어느 땐 슬프고 상실감도 있다. 어느 때 기쁘고 행복을 바라지만 개인의 정서, 감정이란 늘 변화 하기에 그걸 진지하게 실존이라 부른다. 미련한 그림이라 칭하는 작가의 작품들은 일련의 현상들을 개인의 문제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얽히고설킨 다수의 문제로 형태들을 표현하고 있다.
글: 갤러리 도올 신희원

2017 Young Artist Project 꿈드림 워크숍(한원미술관)

이채연은 키치와 민화가 결합된 작품을 하고 있지만, 원래 전공은 유리공예/예술이었다. 반짝이는 것에 매혹되었던 작가는 학창시절을 보내고 세상과 보다 깊숙이 관여하는 생활인이 되면서 많은 도구와 장치가 필요한 유리 작업 대신에 우연히 접하게 된 민화를 소재로 작업하게 되었다. 대중적인 민화나 키치 또한 반짝이는 세계, 기복과 유토피아의 세계이다. 유리 작업과 민화 작업, 그 사이에도 빵 만들기 등 많은 섭렵이 있었으며, 그 과정들은 이것저것이 모여 있는 지금의 작업에 자주 등장한다. 자녀 학대 사건이나 세월 호 등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큰 사건들도 빠지지 않는다. 책가도 형식에서 영감을 받은 서재의 풍경에는 자신의 실제와 상상과 관련된 작은 세계들이 자연스럽게 꼴라주 되어 있다. 그것들은 유기적으로 종합되어 있다기보다는, 단지 집합(또는 축적)되어 있다. 그림이라는 형식을 통해 모인 많은 사물들이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의미의 강요 없이 각각의 세계로 존재한다.

예술은 인간이 섭렵해온 어떤 사소한 것도 무익한 것으로 버리지 않고 넉넉하게 받아준다. 물론 작가란 체험된 것 중 기억된 것을 그릴 것이다. 요즘 작업의 주요 조형 언어가 되어준 민화는 새로움과 창조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그리기의 즐거움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스타일로 변화된다. 이채연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캐릭터인 푸르른 파는 대학입시를 위해 그리곤 했던 정물화의 흔한 소재였지만, 작가의 싸인으로 변용된 것이다. 소중하게 지켜져야 할 가족의 상징인 달걀 등, 평범한 일상은 낱낱이 소재화 되고 또 변용된다. 거기에는 재현주의가 요구하는 순수한 기원과 목표 대신에 끝없는 변용의 과정이 있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등,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하기 조차도 버거워진 시대—달걀 파동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 깨져 바린 달걀 무늬로 된 커튼이 등장 한다—에, 작품 속 일상은 오히려 낯설고 새롭게 다가온다.
이선영 평론

‘가정’이라는 평평한 부적의 뒷면

이채연은 '가정'에서 작업한다. 10여 년 전 자취집에서는 소규모로 뜨개질을 하거나 A4남짓의 작은 종이에 수채화를 그렸고, 현재 남편,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아파트의 작업 방에서는 책상 위에 한지와 안료를 늘어놓고 민화에 몰두하는 중이다. 그에게 집은 생활공간이자 작업공간이었는데, 그가 다루는 소재 역시 우리가 흔히 ‘가정’이라 칭할 때 떠올리는 것들과 적지않이 연관되어 왔다. 예를 들면 파와 식칼, 고추와 양성기, 팬티, 유방, 결혼(!!), 아이, 남편, 굿과 부적. 그리고 복을 가져다 준다하여 한국의 실내 장식을 장악해 온 오랜 클리셰, 모란과 산수. 주제적으로는 가정의 근저에 있는 성과 가사 노동, 먹고살기의 문제를 건드리고, 양식적으로는 뜨개질과 공예, 민화, 만화 따위의 ‘하위 장르’를 망라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다.

뜨개질: 텅 빈, 예쁜 가정의 환상만큼 예쁜
그의 초기작 뜨개질 오브제들은, 엄마, 아빠와의 관계 등 그가 자라온 가정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에겐 작고한 미국 할머니 루이스 부르주아처럼 바람난 부친이 있었다. 참으로 특별할 것 없는 각본이나 그러한 일이 가족 구성원의 마음을 짓누르는 갈등의 밀도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터. 모친은 갈등의 세월 자식들을 키워내며 바느질을 했다. 이러한 엄마와의 관계가 테마가 된 작품 ‘가슴 보자기’에는 사각형의 무명 천에 뜨개질로 뜬 두 개의 유방이 달려 있다. 둘 중 오뚜기처럼 솟은 유방은 엄마를 생각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 쪽은 아직 다 여물지 않은 처진 유방, 엄마 쪽은 야무진 내공으로 단단하게 돌출한 유방으로 표현하였고, 모성에 대한 오마주를 담았다. 부성에 대한 재현은 남성기 형태의 작품 ‘모자를 함께 나누어 쓴 형제’인데, 한 땀 한 땀 흰 실로 짜 올리고 솜을 채운 기둥 형태는 아버지를, 그 기둥 아래 투명한 콘돔에 액체 풀을 소량 넣어 부풀린 부랄 두쪽은 오빠와 자신 두 남매를 상징한다. ‘암컷 소시지’는 기이한 추상적인 형태의 오브제로 눈길을 끈다. 가는 실로 뜨고 솜을 채운 이 작품은 손가락 굵기로 20cm 남짓 길게 늘어나 있고, 핑크색 몸체 양쪽 끝엔 작게 보지와 입술 모양이 떠져 붙었다. 웃기고 이상한, 남성기도 여성기도 아닌 상징적 차원의 양성기다.

파: 생활 감정이 투사된 ‘소규모’ 유머
그가 다양한 필법을 실험함과 동시에 유머감각을 발휘한 파 드로잉 시리즈에는, 각양각색의 형태를 띤 오만 컨셉의 파가 등장한다. 그런데 왜, 파일까. 그는 주방에서 파를 수시로 접할 뿐더러, 미대입시 시절부터 수채화의 주제로써 닳도록 그려 와 ‘눈감고도 그리는’ 소재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그리다 보니 작품 속에 작가의 분신과 같이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단다. 그의 교육적, 환경적 배경은 물론 ‘가정적이고 하찮은’ 생활 감정을 투사하는 소재로, 그가 파를 선택한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도마위의 파’는 식재료로 도마에 오른 파의 결의 방향과 질감이 리얼하게 담겨 있다. 검은색으로 난을 치듯 그린 봉지 안에 파도, 서예의 힘있는 한 획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사람처럼 곧게 서있는 파도 있다. 에로틱한 분홍색의 파 두개는 이런 저런 체위로 교합하듯 붙어있기도 하고, 시들고 썪어서 갈색으로 엉켜있는 파는 추상처럼 강렬하게 보인다. 모두 수채로 한두가지 색만 써 간단히 그려냈는데, 대게 파의 사실적 형태 안에서 색과 농담, 번짐, 붓의 힘과 속도를 조절해 변주된 것이다. 더 유머러스한 것들도 있다. 개중엔 술취해 뻗은 아저씨를 연상시키는 오줌싸는 파도 있고, 말풍선을 통해 ‘화이삼’이라고 말하는 파도 있으며, 파가 꽂꼿히 서서 승리의 v를 그리기도 한다. 파는 인간도 되었다가 글씨도 되었다가 한다. 파는 무엇이든 될수 있는데, 천에 그린 평면 드로잉에 입체 뜨개질을 결합한 몇몇 작품들을 보면 파는 좆과 보지도 된다. ‘팬티를 좋아하는 파’에 여자 땡땡이 무늬 팬티 한쪽 옆으로 삐져나온 파는 ‘유사-좆’처럼 튀어나와 농담을 던진다. ‘도마 위에 칼을 감싸고 있는 파’는 칼과 칼집에 대한 성적인 은유를 이용해, 사물끼리의 교합을 재현한다. 뜨개질로 뜬 파 이파리의 삼각형 끝부분이 칼집이 되어, 손톱보다 작은 나무 식칼을 감싸는 칼집이 되고 있다. 너무나 작은 크기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심각할 수 있는 주제 조차 밝고 귀여운 것으로 풀어내는 그의 미적 취향을 반영한다.

부적: 염원하는 자, 그리고 예술가
관객 참여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부적 써드립니다’는 전시를 찾은 관객에게 직접 그림 부적을 만들어 준 작업이었다. 복을 빌며 잘살고자 하는 염원을 코믹한 설정(‘뻥이요’ 과자가 놓인 제단과 파다발을 안고 도인으로 분한 작가)과 가짜 부적으로 전했다. 글씨가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서 잠을 자고 있거나, 한자 모양으로 그린 집 안에 ‘가정부방’ ‘주인방’ ‘자식방’ 등이 쓰여 있고, ‘복’이라는 글자 귀퉁이마다 화폐 기호와 성별 부호가 달려있는 식의 부적들을 만들었다. 점집에서 부적을 쓰는 사람들은 과연 누굴까? 뭔가가 간절한 사람들이 쓸 것이다. 물신화된 이미지를 통해 안심하고자 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부적의 신성함을 감안해 본다면, 물론 그의 부적은 놀림에 가까운 장난이다. 한편 무속적인 것 외부에서 무속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입장에서 접근했을 때, 일련의 풍속을 이루는 기호들에 대한 탐구와 재배치, 혹은 놀이의 과정은 유의미해 보인다. 그의 관심은 오래 지나지 않아 민간 기복 신앙이 폭넓게 잠재된 민화 장르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첫 창작 민화인 ‘꿈’은 멀리 아파트 건물 숲을 배경으로 새들이 돈다발을 물고 날아가고, 전면엔 소나무와 모란, 무지개 등이 배치되어 있는 그림이다. 돈을 물고 가는 예스런 새의 모습과 도시풍경의 조합이 익살맞다. 그는 잘살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아파트 시세나 건강 같은 솔직하고 현실적인 염원이다.

민화와 만화: 가정생활의 알레고리
대학에서 유리공예를 전공하고 뜨개질(텍스타일) 디자인 회사에 다니며 작업을 병행했던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인 2012년부터 새롭게 민화를 배웠다. 민화를 본뜨며 익힌 필법을 이용해 육아, 결혼 등에 대한 생각을 담아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중이다. 봄에 그린 화사한 파 다발과 사과 두 개는 그의 메인 테마인 파를 동양화로 풀어낸 자화상같은 정물화다. 이 근작들은 모두 민화 기법에서 출발했지만, 그의 기존 작업뿐 아니라 동양화, 불화, 성경에 기반한 서양 미술, 만화, 드라마 등 매우 다양한 출처의 요소들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삶과 관련된 동서고금의 온갖 알레고리가 랜덤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을 활용한 그의 ‘연성’은 본래의 것들이 상징하는 것보다 복잡한 의미망으로 열려있다. ‘태아’라는 작품에서는, 아기가 질 벽을 상징하는 겹겹의 분홍색 배경 속에서 한쪽 손을 치켜 든 불경 속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포즈를 하고 걸어나오고 있다. 구름과 복숭아 꽃잎이 흩날리는 사뭇 몽환적인 분위기 속, 아기의 눈은 만화 속 별을 박은 듯한 눈동자로 표현했다. ‘임신’은 아이가 생겼을 때의 그의 생각을 서양미술 속 수태고지의 도상에 담아 그린 그림이다. 액자식 구성으로 된 사각형 테두리엔 연화문을 둘렀다. 그림 속 임신 사실을 알리는 웃고 있는 천사의 얼굴은 만화 속 스마일 가면처럼 평면적이고, 여성은 다소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임신 사실을 접하고 있다. (과거 그가 실제로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든 생각은 ‘내가 왜? 지금 날 놀리는 거지?’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아빠와 아들’은 성모자상의 도상 안에 아빠가 아이를 안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생생한 표정의 아이와 달리, 아빠의 단추처럼 동그란 눈에 영혼이 없는 마네킹처럼 어색한 표정을 만화적으로 표현했다. 이 그림 하단엔 순정만화 식으로 그린 장미가 장식되어 있다. 동양화라는 매채로, 성모자의 ‘모’를 ‘부’로, 원화가 가졌을 성스러움을 만화적 표현의 친숙함으로, 기존의 기호는 여러 번 비틀어진다.

유한한 삶, 염원, 그리고 농담
최근 완성한 결혼에 대한 생각을 담은 그림은 결혼에 대해 그가 떠올리는 여러가지 아이디어와 상징들을 한데 모아 구성한 것이다. 톱니바퀴 모양의 원의 중심엔 나무 아래로 아담과 임신한 이브가 서있고, 원 바같 네 귀퉁이에는 각각 입신양명을 뜻하는 물고기, 부부를 지켜보는 아기, 만화 속 장미,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새가 수호신 삼아 배치됐다. 유혹, 임신, 열정, 위험, 성공과 실패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과정 등 복잡하고 상반된 생각들을 내포한 요소들이 한 그림 안에 담겨 있다. 반짝이는 만화적 표현과 함께 화면의 모든 요소가 예쁘고 친숙한 것들이지만, 삶의 유한함을 표현한 바니타스화처럼 어딘가 쓸쓸하다. 그가 결혼의 상반된 면들에 대한 고민과 염원을 거쳐 공들여 찾은 균형점에서 완성된 이 그림은 모두가 안도할만한 결혼에 대한 일차원적 이미지로부터 몇 걸음 더 멀리 물러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가정’이라는 반경 안에서 느끼는 생활 감정에 대해, 또 스스로 가정을 꾸리는 사람으로서 처하는 상황과 환경에 대해 매우 진솔하게 접근하는 작가다. 실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기대는 ‘가정’에 관한 고정된 이미지는 억지춘향 혹은 정신승리를 위한 부적 같은 것이리라. 우리가 가정을 통해 삶의 고통을 경험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예술을 통해서 그 평평한 가정의 이미지의 이면을 풍부하게 상상하고 사유할 기회는 쉽게 만날 수 없다. 우리가 삶의 현실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것들과 접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정’인데도 말이다. 이채연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간의 알레고리를 매개로 삼아 조금씩 그 이면에 대한 힌트를 던진다. 그리고 실전 중에 나온 태연스러운 유머를 던진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지? 그럼 이런 장난은 어때?’
김수영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