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根操:뿌리를 잡다)의 뜻으로 ‘나무가 뿌리를 잡고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근조(謹弔:사람이 죽어 삼가 슬픔 마음을 나타냄)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노래.
이 책은 위안부로 끌려간 한 소녀와 그 소녀를 지켜보는 나무의 이야기이다.
위안부는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이다. 암담한 내용이기에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다소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많다. 그리고 이런 잔인한 일이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은 감상자의 멘탈에 충격을 주고, 남아 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런 슬픈 역사를 다룬 작품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보고 나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마음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직면해야 할 과거이기는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지난날의 슬픔안에서 머물 수는 없다. 직면하고, 알고, 공감하되 지금을 되도록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거의 위안부에 대하여 완전히 알 수 없지만 남은 사람의 증언과 기록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과거의 일에 대한 온전한 체감은 힘들지만 공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감은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길게 기억될 수 있게 한다.
이 슬픈 역사에 대해 공감하며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풍경을 그렸다. 사시사철 밤낮으로 변하는 풍경을 통해서 애도의 마음을 표현했다. 소녀(위안부)는 없지만 소녀의 자취가 남은 풍경이자, 소녀를 기억하는 존재인 수호가 남아 있다. 풍경과 수호는 소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소녀는 전쟁에서 희생되었고 자연과 후대 사람들은 소녀를 애도하는 노래 ‘근조가’를 부른다.
생때 같은 자식을 잃은 소녀의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렸다. 조금 더 공감하고 감정이입 하기 위해서 표지의 소녀그림의 모델로 아들을 참고했다.
이 슬픈 역사를 기억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림의 시작
하늘과 산이 잘 보이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회적거리가 잘 지켜지는 비교적 한가한 동네에 살고 있다. 이런 한적한 풍경 속에서 햇빛을 등지고 노는 아이들이 있다. 놀이에 한창인 아이들의 실루엣을 햇살이 감싸고 있다. 따사롭고 행복해 보인다. 시국은 역병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로 뒤덮여 있지만 그 아이들은 마냥 즐거운 한때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보고 있으면 평화로워진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니 행복한 유년의 시절을 강제로 빼앗긴 소녀들이 생각난다. 위안부라 불리운 소녀들. 이 소녀들과 함께한 평화로운 풍경을 지워버린 일제의 침략. 어느 날 나타난 트럭과 함께 풍경에서 사라져 버린 소녀들. 그 참담한 암흑기의 시간에서 많은 소녀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마지막 그림 모티브
그림의 전체적인 틀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와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왔다.
일월오봉도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천지자연이 우리나라를 보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그림도 일원오봉도처럼 해와 달, 산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참혹한 과거로부터 소녀를 지켜 주고 품어준다.
무릉도원도는 전통적인 이상향의 장소를 그린 그림이다. 소녀가 현생에서는 슬프게 생을 마감했지만 후생에서는 전쟁이 없는 이상향의 장소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그림의 ‘산’의 전체적인 구성은 조선후기 화가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를 참고했다. 금강전도는 마치 새가 되어 하늘은 나는 것 같은 부감(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 봄)형식으로,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원형구도에 토산(土山)과 암산(巖山)이 태극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금강전도의 구성처럼 이 그림 역시 왼쪽에는 토산(土山) 오른쪽에는 암산(巖山)있다. 토산에는 소녀의 과거와 관련된 것이 있고, 암산에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 들이 있다. 토산의 형태는 초록색의 경사가 완만한 반원모양으로 여성의 가슴 또는 무덤을 연상된다. 그에 비하여 암산은 분홍색의 솟아오른 형태로 여성의 유두와 닮아 있다. 토산과 암산 둘 다 땅에 묻힌 소녀를 상징하기도 하고 차갑게 죽어간 소녀의 삶과 몸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림의 중앙에 가로로 강이 흐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물이 지나가는 길은 생명을 생성하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도 하지만, 단절을 말하기도 한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우리의 어두운 역사인 분단을 상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