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_없는_아트워크.jp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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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_그림의_집_1.jpg
내 그림의 집_ 스틸 컷, 2023, 애니메이션, 컬러, 사운드, 3분

이 작품의 모티브는 내 그림 엄마에게(65x100cm, 한지에 분채, 2015)이다. 한지에 분채로 채색한 그림을 다시 디지털로 작업했다. 그림에서 영상으로 오면서, 그림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과 연장되고 확장된 그림 속 세계를 보여준다.

그림< 엄마에게 >는 주방에 엄마가 앉아 있는 그림으로 엄마에 대한 서사를 담고 있다. 영상에서는, 엄마가 된 나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영상 속에는 나는 없고, 주방이라는 공간과 거기 있는 물건 있고 주방과 연결된 공간이 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한 존재인 ‘파’가 나온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가 생기고 살림을 하는 일상이 작업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어떤 케미를 이루고, 어떻게 살아 가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나의 공간은 주방이고, 가족은 장난감과 강아지와 병아리, 참새 등 귀엽고 보살펴야 될 느낌을 주는 물건과 동물들로 상징된다. 지금의 내 삶은 그런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 이런 일상속에서 자연스럽게 내 존재는 주방에 늘 있는, 흔하게 먹는 식재료이자, 개인적으로 코리안 아줌마의 상징으로 선정한 ‘파’로 대신하게 되었다. 배경 음악 역시, 음계 중 ‘파’가 은은하게 리듬을 타며 연주되어 ‘파’를 강조하고 있다.

‘파’가 되어서도, 나의 자리를 찾고 흔적(작업)을 남기는 등의 ‘나’를 찾고 싶은 의지는 가족과 나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점점 커져간다. 일상과 고민이 돌고 돈다. 내 작업은 여기서 시작된다. 내 그림의 집에서.

영상: https://youtu.be/_SOtAw3dD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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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a)
​_ 책(148*210, 양면컬러, 78쪽)

그림 속에서 나는 ‘파’ 로 등장한다.  자화상이다.

‘파’는 일상에서의 솔직한 나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평소의 나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 대신 그림 속에서 활약하고 있다. ‘파’는 그냥 ‘파’가 아니고, 나다. 그래서 “이것은 ‘파’가 아니다.” 이다.
‘파’로 작업하게 된 사연은, 파는 입시시절 수채화 정물로 나왔고  잘 그려 내어서 자신감을 생기게 해주었다. 오랜 자취시절에 만들어 먹었던 음식에는 저렴하기도 하고 약방의 감초처럼 쓰임이 좋았던 ‘파’가 많이 들어갔다. 그 후 본격 살림을 시작하고 아줌마가 되고 보니, 프랑스의 아줌마는 바게트를 크라프트 종이봉투에 넣고 다닌다면(막연한 상상) 코리안 아줌마는 ‘파’가 삐죽 나온 검정 비닐 봉투를 들고 다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이렇게, 친숙해진 ‘파’를 그리게 되었다.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내면의 목소리를 잘 듣고 이해하고 알리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창작자로, 엄마로, 주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역할 중에서 창작자의 몫이 없어지거나 나머지 역할만 해야 된다면, ‘나’라는 존재는 흐려지고 생명력을 잃은 느낌이 된다.  특히 엄마로서의 역활은 나와 가족이 한덩이로 묶이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점차 흐려지는 나 자신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이 ‘파’작업의 시작이자 이유이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공감도 얻고 싶다. 공감은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힘을 얻고 싶다. 엄마로서 살아가는 것은 공감과 지지를 얻기 쉽다. 하지만 창작자로서 엄마와 주부로 산다는 것은 지지를 얻기가 어렵다. 지지를 얻지 못한 창작자의 길은 외롭고 힘들다. 부디 따스한 온정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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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의 굴레_ 디지털 드로잉


우리 집은 겨울이 오면 집에서 '밥'을 차려 먹을 일이 많아진다. 밥을 차려 먹을 일이 많다는 것은 곧 집에서 살림을 담당하고 있는 나의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평소에도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함께 밥을 먹는데, 겨울에는 김장, 남편 생일, 성탄절, 한 해의 끝과 새해, 내 생일, 설 연휴 등등의 이벤트가 추가된다. 거기다 겨울 방학으로 집에 있는 아이의 식사를 챙겨야 하기도 한다. 아……, 또 저번 겨울에는 남편과 아들이 연달아 코로나 확진이 되면서 집에서 식사하는 날이 더 늘어나기도 했다. 겨울철 추운 날은 외식도, 장보기도 어렵다. 아무튼 일이 많아져서 성수기 특근 같은 느낌마저 든다.
‘밥’은 살림 담당인 내가 해야 할 일이자 해내야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 귀찮을 때가 많다. 특히 작업(그림)이 잘 안되는 날은 더더욱 그렇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도 당연히 그렇고. 그래도 끼니는 해결해야 한다. 내 일이니까!

밥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와 작업과 밥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새삼 말하지만, 나는 작가다. 하지만 내가 작가로 활동해 버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작업 재료비 정도다. 마이너스일 때도 있고.
그렇다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장이나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것 대신 밥하는 일 즉 살림을 택했다. 취집인 셈이다. 살림을 직장처럼 여기고, 작업과 살림. 이 두 가지를 투 잡으로 보기로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지만, 내가 돈을 벌지 않아도 그냥저냥 먹고살 만할 것 같다고 생각 해주는 가족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렇게 버텨 보기로 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엄마로서, 주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니 투 잡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밥하는 일, 살림하는 일을 ‘잡’(job, 일)으로 보아야, 내 작업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고, 작업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덜 수 있다. 살림을 해야 해서 작업하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아야 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 아니라, 살림을(일) 열심히 했으니 작업할 자격이 된다 로. 작업하느라 살림을 소홀히 하게 되어서 생기는 미안함이 아니라, 작업했으니 밥은 조금 게을리해도 괜찮아 로.
뭐 이런 자기 합리화가 다 있나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마음먹어야 힘든 여건 속에서도 작업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작업을 하기로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쭉 밀고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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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_ 2022, 한지에 분채, 38x74cm 마지막장: 65x138cm (글: 이수연, 그림: 이채연) 

근조(根操:뿌리를 잡다)의 뜻으로 ‘나무가 뿌리를 잡고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근조(謹弔:사람이 죽어 삼가 슬픔 마음을 나타냄)의 뜻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노래.

이 책은 위안부로 끌려간 한 소녀와 그 소녀를 지켜보는 나무의 이야기이다.
위안부는 일본 제국주의 점령기에 일본에 의해 군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이다. 암담한 내용이기에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다소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많다. 그리고 이런 잔인한 일이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은 감상자의 멘탈에 충격을 주고, 남아 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런 슬픈 역사를 다룬 작품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보고 나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마음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직면해야 할 과거이기는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지난날의 슬픔안에서 머물 수는 없다. 직면하고, 알고, 공감하되 지금을 되도록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거의 위안부에 대하여 완전히 알 수 없지만 남은 사람의 증언과 기록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다. 과거의 일에 대한 온전한 체감은 힘들지만 공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감은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길게 기억될 수 있게 한다.

이 슬픈 역사에 대해 공감하며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풍경을 그렸다. 사시사철 밤낮으로 변하는 풍경을 통해서 애도의 마음을 표현했다. 소녀(위안부)는 없지만 소녀의 자취가 남은 풍경이자, 소녀를 기억하는 존재인 수호가 남아 있다. 풍경과 수호는 소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소녀는 전쟁에서 희생되었고 자연과 후대 사람들은 소녀를 애도하는 노래 ‘근조가’를 부른다.
생때 같은 자식을 잃은 소녀의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렸다. 조금 더 공감하고 감정이입 하기 위해서 표지의 소녀그림의 모델로 아들을 참고했다.  

이 슬픈 역사를 기억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림의 시작
하늘과 산이 잘 보이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회적거리가 잘 지켜지는 비교적 한가한 동네에 살고 있다. 이런 한적한 풍경 속에서 햇빛을 등지고 노는 아이들이 있다. 놀이에 한창인 아이들의 실루엣을 햇살이 감싸고 있다. 따사롭고 행복해 보인다. 시국은 역병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로 뒤덮여 있지만 그 아이들은 마냥 즐거운 한때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보고 있으면 평화로워진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니 행복한 유년의 시절을 강제로 빼앗긴 소녀들이 생각난다. 위안부라 불리운 소녀들. 이 소녀들과 함께한 평화로운 풍경을 지워버린 일제의 침략. 어느 날 나타난 트럭과 함께 풍경에서 사라져 버린 소녀들. 그 참담한 암흑기의 시간에서 많은 소녀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마지막 그림 모티브
그림의 전체적인 틀은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와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왔다.
일월오봉도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등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천지자연이 우리나라를 보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그림도 일원오봉도처럼 해와 달, 산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참혹한 과거로부터 소녀를 지켜 주고 품어준다.
무릉도원도는 전통적인 이상향의 장소를 그린 그림이다. 소녀가 현생에서는 슬프게 생을 마감했지만 후생에서는 전쟁이 없는 이상향의 장소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란다.

그림의 ‘산’의 전체적인 구성은 조선후기 화가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를 참고했다. 금강전도는 마치 새가 되어 하늘은 나는 것 같은 부감(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 봄)형식으로,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원형구도에 토산(土山)과 암산(巖山)이 태극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금강전도의 구성처럼 이 그림 역시 왼쪽에는 토산(土山) 오른쪽에는 암산(巖山)있다. 토산에는 소녀의 과거와 관련된 것이 있고, 암산에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 들이 있다. 토산의 형태는 초록색의 경사가 완만한 반원모양으로 여성의 가슴 또는 무덤을 연상된다. 그에 비하여 암산은 분홍색의 솟아오른 형태로 여성의 유두와 닮아 있다. 토산과 암산 둘 다 땅에 묻힌 소녀를 상징하기도 하고 차갑게 죽어간 소녀의 삶과 몸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림의 중앙에 가로로 강이 흐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물이 지나가는 길은 생명을 생성하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기도 하지만, 단절을 말하기도 한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온 우리의 어두운 역사인 분단을 상징하기도 한다.

가족을 위한 축복 _ 2021, 한지에 분채, 65x65cm

진천 스타일 민화

우리 가족은 낯선 지역인 진천으로 이사 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잘 자리잡고, 잘 살기를 기원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 이 새로운 동네에는 수박, 복숭아, 사과 등 과수원이 많이 있다. 지역 농산물을 홍보하는 조형물도 많이 보인다. 이곳의 특색이다.
민화에서는 지역색이 있는 기물이 나오고 그것이 복을 기원하는 의미로 풀이되기도 한다. 그것처럼, 내 그림에도 지역 명물을 그려 놓았고, 풍성한 삶을 비는 마음도 담았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진천에 사는 어느 무명화가가 가족의 복을 기원하며 그린 민화이다
2022년의 복 _ 2021, 한지에 분채, 50x45cm

문배도 혹은 세화.

문배도: 새해에 외부로부터 집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인 문에 붙여 잡귀를 막는 구실을 하는 목적으로 제작된 그림.
세화: 새해를 축하하는 뜻으로 그린 그림.

이수연 작가님의 '세종시의 복' 이라는 주제의 미디어전시에 사용된 그림이다.

‘옥’아니고 ‘복’(복숭아).
보름달과 같은 환한 복숭아는 어둠속에서 길잡이가 되어 주고 밝은 기운으로 잡귀를 물리쳐 준다.
그림의 중간부분 - 글씨’ㄱ’의 위에는 ‘소’의 뒷모습. ‘ㄱ’의 아래에는 호랑이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2021년(소띠)가 가고 2022년(호랑이)이 오고 있다는 뜻.

작년 여름 갔던 세종(조치원)에 있는 복숭아 농원을 다녀온 후 남은 인상을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로 옮겼다. 복숭아 나무들이 어깨동무 하듯 넝쿨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를 걸었다. 위로는 솜털이 뽀송뽀송 주홍빛 아이(소녀)의 뺨 같은 열매와 푸릇한 잎사귀. 아래에는 백살을 훨씬 넘긴 듯 한 노인의 손가락 같은 거친 뿌리. 복숭아 나무 정녕들이 숨어 있을 듯한 느낌이랄까?ㅎㅎ 신비한 느낌으로 남았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기도 _ 2021, 한지에 분채, 95x70cm

그림의 시작은 소설 속 한 구절이다.

…..딸기가 듬뿍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마법의 케이크였다. 참고로 딸기의 꽃말은 행복한 가정. 즉 이 케이크에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행복한 가정이야 말로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과분한 행복을 얻은 사람은 그것을 놓치게 될까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것을……..행복을 느끼며 언제 그 행복을 잃을지 몰라 두려워 하기를 바랐다.
(295~296 마녀식당으로 오세요. 구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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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 행복에 겨운 삶, 사랑하는 가족, 풍족한 부(富), 건강, 사람들…기본적인 행복의 공식 같은 것들은… 사실은 위태로운 반석 위에 있다. 이 반석은 여러가지 조건들이 유지될 수 있을 때 지속된다. 그 조건이란 마음, 건강, 돈… 같은 것이다. 그것들 중에서 사람의 ‘마음’은 제일 쉽게 흔들리고 지속되기 어렵다.

애초부터 아슬아슬하게 세운 행복의 반석-가정이 흘러내리고 있다.
아….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 깊이 빌어야 할까?
노력한다고 좋아질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이 오는 걸까?
엄마의 방 _ 2021, 한지에 분채, 140x304cm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부모님으로부터 그림 부탁을 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엄마는 집에 둘 병풍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셨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야 전시를 앞두고 그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긴 했는데, 엄마가 원하는 그런 병풍은 아니다. 예쁜 전통적인 민화병풍을 원하셨는데, 내 마음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게 된다. 이런 게 부모말과는 반대로 하고싶은 자식의 마음일까?

배경과 병풍
병풍은 공간(여기서의 의미는 background)을 다른 차원으로 환기시켜 주는 장치이다. 병풍 앞에 있으면 병풍에 그려진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일종의 공간이동장치. 내가 그리고자 하는 병풍은 엄마를 위한 것이므로 엄마를 어떤 공간으로 모셔야 할지를 생각했다. 엄마가 있어야 할, 있었으면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이 막연하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상의 자료들을 수집하고, 조금씩 살을 붙이면서 구체화했다. 그림의 작은 소품으로 - 어린시절 엄마가 매어준 복주머니, 설악산 여행하고 기념품으로 사 오신 타원형 대리석 장식품, 엄마가 수 놓던 초가집이 있는 수틀과 같이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 그림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것들은 엄마와의 추억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각각의 오브제들이 정해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라는 가상의 무대에 분위기 조성을 위한 소품 같은 것이다.

엄마 뒤에 있는 초라한 현실의 배경을 지우고, 내가 마련한 배경(병풍) 앞에 엄마를 모셔와야 작품이 완성된다. 그리면 그릴수록 마음이 착찹해지는 작품 중 하나다. 답답하고 한숨이 나는. 현재의 내가 엄마를 떠올릴 때는 이런 마음이게 된다.
엄마에게 _ 2015, 한지에 분채, 65x100cm

등장 인물 – 엄마와 아기 
어린아이가 엄마를 그린다. 예쁘게, 우아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공주님 같이. 아이들은 엄마를 왜 이쁘게 그리려고 하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은 이쁘게 보여서? 아이의 희망사항을 그린 걸까? 특히 여자아이들이 더 그런 것 같다. 어린시절의 나도 그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엄마. 세팅 된 머리에 풀 메이컵을 하고 화려한 드레스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모습으로 엄마를 그렸다. 실제의 엄마는 아담한 몸집에 뽀글뽀글한 파마머리를 하고 몸빼바지를 입은 아지매였는데……

돌이켜 보면 어릴 때 나는 엄마의 원래 모습을 알고 있었지만, 거부하고 최대한 화려하고 이쁘게 그리고 싶어했던 것 같다. 엄마의 초라한 모습이 싫기도 했고, 어른이 되면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그림의 속의 여자는 어린시절 내가 생각하는 예쁜 여자, 또는 엄마를 어떻게 그렸는지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렸다. 만화에 나오는 공주님들이 많이 하는 헤어스타일 - 고데기로 말은 번데기 컬, 엄마의 화장대에 있던 늘 한결같이 같은자리에 있는 단출한 화장품 – 쑥색 아이펜슬. 그리고 그 시절 연예인의 짙은 화장을 생각하며 그렸다. 

앞서 말한대로 그림의 여자는 우리 엄마다. 엄마는 아기를 안고 앉아 있다. 이 포즈는 고물상에서 주워 온 성모상 그림에서 왔다. 성모님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다.

고물상 구석에 있던 성모상은 지나가는 행인3과 같은 존재인 나에게 강렬한 기운을 보냈다. (거기 지나가는 키 큰 아줌마~ 날 보라고!) 가던 길을 멈추고 2번의 뒷걸음과 0.5초간 생각 후 고물상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고물상 제일 안쪽 선반 구석에 있던 그림을 집으로 모셔왔다. 이 성모상은 어느 러시아 이콘 장인이 그렸을지도 몰라~ 그러면서… 자세히 보니 프린트 였다!

성모상 그림에서 받은 영감으로 우리 엄마를 그린다. 나에게는 온니 원, 완전 특별한 엄마. 내 그림에서 엄마가 안고 있는 아이는 내가 아니고, 엄마에게 완전 소중한 아들인 나의 오빠다. 오빠는 그림처럼 어린아이가 아니다. 암 투병 중인 중년의 총각이다. 아픈 자식은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엄마들에게는 어린아이 같다.

배경 - 엄마의 방
엄마의 진짜 방은 주방 같다. 그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엄마를 머리속에서 떠올려보면 엄마 뒤의 풍경은 주방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주방은 잡지에서 본 광고를 보고 그렸다. 광고는 이렇게 말했다. ‘주방은 주부들의 행복한 놀이터이다.’ 밥해서 가족들 배불리 먹이는 것이 행복한 엄마는 넓고 아늑한 주방을 가지고 싶어하셨다. 나도 그렇고. 나의 로망 주방은 칠면조구이를 차릴 수 있는 큰 식탁이 있고, 좋아하는 색으로 도색 된 수납장과 아기자기한 소품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제법 큰 주방이다. 미국 성탄절 카드나 타샤 튜터의 주방 같은. 이런 나의 로망이 그림에 반영되었다.

다시 그림을 살펴본다. 사람 외에도 여러가지 것들이 그려져 있다.

-차를 마실 수 있는 도구들 - 아이들이 학교 간 뒤에나 집안일을 끝내고 먹는 차는 꿀맛이다!

-바나나 – 바나나가 비쌌던 시절 엄마는 자식들에게 바나나를 양껏 못 사줘서 미안해하셨다.

-파, 요리하다 만 야채들, 오븐에 칠면조 구이 – 파는 나의 페르소나로서 등장, 오븐 칠면조는 나의 로망이다.

-바닥에 있는 장난감들 – 그림 속 아이가 가지고 싶어했던 장난감. 아들이 아프고 보니, 엄마는 아들이 어릴 때 사 달라는 것을 사주지 못해 미안하고 한이 된다고 한다. 

-주방 창밖으로 마당 - 마당 있는 집이다. 석류나무와 장독대, 강아지, 병아리가 있다. 석류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고. 장독대와 작은 동물들은 구수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담당하고 있다. 이 소품들로 하여 엄마가 간절히 비는 가정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엄마의 메시지(내 딸 채연아 축아한다 한상 건강하고 잘살아 다오)
 _ 2019, 한지에 분채, 70x130cm

엄마가 내게 보내는 핸드폰 메시지는 “잘 살아라”, “건강 챙겨라”, “밥 잘 챙겨 먹어라”, “감기 조심해라”, 등등 관심 어린 잔소리이긴 하지만 상투적인 문구가 많아서 무심히 흘려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나를 눈물 한방울 똑 떨어지게 하고,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찡한 마음을 만들어내는 파워가 쎄다.
엄마는 노안으로 잘 보이지도 않고, 한글쓰기가 서툴다. 오타인지, 맞춤법이 틀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글도 뒤섞여 있다. 비뚤빼뚤한 아이의 글씨 같은 느낌의 문자 메시지를 나에게 보낸다. 능숙하지 않은 글이지만, 엄마의 메시지는 오래 보게 된다. 진심이 듬뿍 담긴 글이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메시지도 엄마가 더 많이 늙고, 건강이 나빠지면 차츰 줄어들고 어느샌가 없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택배로 보낸 먹거리들도. 냉장고를 채운 김치, 떡, 고춧가루, 장아찌 등등 차차 줄어들고, 없어질 것이다. 한때는 이런 엄마의 손길이 귀찮아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관심들이 언제 없어질지 두렵기만 하다. 냉동실에 있는 엄마가 보내준 떡이 몇 개 안 남았을 때는 이게 마지막 떡일까 싶어서 울컥하기도 한다.

이런 울컥은 잠깐이고, 평소에는…. 엄마가 나에게 주는 마음을 나의 마음 한켠에 두고 잊어버리고 산다. 잊어버리고 사는 나 자신이 얄밉다. 엄마의 그 마음이 너무나 곱고 예쁜데, 잊혀 지는 것이 아쉬워서 엄마의 마음을 새기고 기억하고자 다짐을 한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엄마사진 꺼내 놓고…우정의 무대bgm이 나와야 할 것 같은…)

엄마의 메시지는 나에게 똑바로 살라는 계몽적인 구호가 새겨져 있는 비석 같이 우뚝 남아 있다. 실천하기 어려운 구호이지만.
도화 _ 2021, 한지엥 분채, 19x21.5cm

‘끼’가 있는 사람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끼’는 섹슈얼한 매력, 여러 이성과의 사귀는 능력을 말한다. 아름다운 외모로 이성을 끄는 능력이 아닌, 이성의 마음과 몸을 쉽게 열게 하고,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타고난 성정이고 미묘한 느낌이다.

이 ‘끼’가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우리 부모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빠는 참 '끼'가 많았다. 그 끼 때문에……그에 따른 사건도 많았다.
엄마는 보통? 아니 중하? 하? 아니 모르겠다. 엄마의 이런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해서는. 한때 누렸던 ‘라떼는 말이야’ 식의 추억이라든지, 리즈시절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내 기준으로 별다른 에피소드가 없는 것 같아서 별점 2개정도.
아무튼 두 분의 남녀(이성)인간관계 스타일은 많이 달랐다.
아빠는 자신의 끼의 욕망이 저지른 일로 주변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도 상처받았고 거기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이런 일에 대해서 어버버하게 대응하는 엄마를 보면 가슴 아프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둔해 보이기도 하고 무력해 보이기도 했다.

사람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진짜 이 '끼'라는 것은 본인이 주체할 수 없고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되는 것일까?
부부사이에 그 ‘끼’의 차이가 많이 난다면, 상대적으로 없는 쪽은 억울한 느낌 든다. “누구는 못 놀아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줄 아나?” 이런 말이 나오게 된다.

엄마 아빠의 '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복숭아를 그렸다. 복숭아의 색은 분홍빛으로 홍조 띤 얼굴 같고, 형태는 하트모양 같기도 하고 엉덩이 비슷하기도 하다. 거기다 향긋하고 맛도 좋다. 가까이하고 싶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과일이다. 사주에서도 이성을 매혹시켜서 자신의 주위에 머물게 하는 힘의 의미를 가진 ‘도화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 그림은 ‘복을 부르는 민화’나 주술의 ‘힘이 깃든 부적’처럼 염원하는 마음의 힘이 있기를 바라면서 그려졌다. 그림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의 매력이 생길 거예요. 믿어보세요!

복숭아가 고삐 풀린 엉덩이 같다. 엄마가 덩실덩실 활기를 찾았으면 좋겠다.
 갈현동에서 본 장미 _ 2019, 한지에 분채, 24x25cm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충북 진천. 이 곳으로 오기 전에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한 3년반쯤 살았다. 그런데 그 시간보다는 더 길게 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육아의 최절정기였고, 그 곳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런 것 같다. 육아도 힘들었고, 고민도 많았다. 아이의 나이는 5세에서 8세 사이. 어린이집에서 초등학교 여름 방학 까지다. 지금은 12살이다. 원래는 서울의 다른 동네에 살았는데 영유아 어린이집을 졸업하면서 다음 보육기관으로 고른 곳이 갈현동에 있어서 이사 오게 되었다. 보통 별 다른 사정이 없으면 집 근처 어린이집으로 아이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고심해서 고르고 고른 어린이집으로 가기 위해서 이사를 감행했다. 나름 열혈 부모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어린이집은 공동육아 협동조합으로 이전 어린이집과는 다른 점이 많다. 부모가 협동조합을 이루어,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서로의 육아를 돕고 나누는 것이다. 공동으로 육아를 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교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의 인간관계는 대체로 심플했다. 그렇던 나의 일상은 공동육아를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벤트가 늘어나고, 어울리고, 부딪치고 하면서, 스트레스도 받아 힘들기도 했었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고, 각종 행사로 바쁘게 되면서 단조로운 일상은 생기가 도는 것 같아 좋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작업(미술)을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부터 결혼전까지는 회사에서 퇴근하고 조심스럽게 깨작되는 작업이었다면, 그것보다는 더 열정을 품게 되었다. 나의 이야기로 작업을 하고 싶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작업에 대한 의지와 그에 대한 능력, 늦깎이 작업의 어려움, 집안 환경, 등등을 되묻고 되물어도 답이 없는 자문자답의 나날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새로운 육아의 장이 되는 곳이고, 개인적으로는 작업을 다시 시작 한 곳이다. 전환이 되었던 동네다.

그 동네에서의 장면이 기억난다.
좋은 전시를 본 후, 자극받아서 상기되어 들뜨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내가 초라해 보여서 서글픈 날 이였나? 아무튼 봄과 여름 사이 어느 날, 늦은 오후,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인 연신내역에서 내렸다. 6번출구로 향한다. 출구 계단을 점점 올라 갈수록, 아직 남은 오후의 햇살이 제법 강한 것을 느꼈다. ‘아직 낮이네. 늦게 도착하지는 않았네.’ 이렇게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출구를 나섰다. 각종 포장마차와 호객행위를 지나치고, 떡볶이, 도너츠 등등의 좋아하는 간식거리의 유혹도 뿌리 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걸어가기가 힘들어서, 하교하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마을 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갈현동 비탈길 끄트머리에 있는 아이의 어린이집.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등 하교 차량 일명 노랑버스가 없다. 부모가 직접 아이의 등하교를 해야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은 아이와 길을 같이 걷는 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지만 그때는 정말 귀찮았다! 다시 그 날의 하원길로 돌아와서,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들과 아이들 소리에 시끌시끌한 어린이집,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떡볶이, 치킨, 냉면집이 촤라락~ 생각난다. 그리고 근처 아파트 화단의 청량한 빛을 내뿜는 붉은 장미가 영화 엔딩 컷처럼 떠오른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장미가 한창인 5월.
희망_ 2021, 한지에 분채, 32x45cm

나의 희망이.... 저 언덕...노랑 봉다리 안에 담겨 있다.
저기 저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봉다리가 언덕 어느 나무에 안정적으로 보금 자리를 잘 마련한 것 같지는 않다. 산들바람 한방이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날아가 버리게 된다면, 그것 그대로도 좋을 것 같다.
봉지는 열려 있다. 개방적이다. 대부분의 것들을 포용한다. 그래서 봉지의 비행은 그 안에 담겨진 나의 희망을 흩어져 버리게 할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게 할 수도 있다.
⠀
나는 사소한 것에 희망을 건다
나는 기도하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것들에 기도를 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고로 나는 애니미즘적인 사람?
 자는 아들 _ 2019, 한지에 분채, 10x18cm

자는 아이의 얼굴을 본다

처음에는
귀여움이 보이고

그 다음에는
숨쉬는 소리
생각
연민
평화
아련
.....을 느낀다

마음이 녹아내린다.

착한 아이의 자는 모습은 안타깝다.
잘못을 한 아이의 자는 모습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픈 아이의 자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다.
고단히 아이의 자는 모습은 기특하다.
커가는 아이의 자는 모습은 놀랍다.

내 새끼...

보송보송한 솜털.
간결하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봐도 봐도
눈에 담고 싶은 이 순간.

돼지가족의 한때_ 2019, 한지에 분채, 42x42cm

언젠가 어느 공직자가 술자리에서 “국민은 개, 돼지다”라 말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 모욕적인 언행에 분노했었다. “국민은 개 돼지다”와 비슷한 표현은 예술작품에서 꽤 만날 수가 있다. 영화 설국열차에서도 나온다. “나는 모자, 당신들은 신발입니다.” ”애당초 티켓은 정해져 있었고 순서는 변하지 않을 것.” 영화는 영화. 그래서 영화에 나온 대사는 비현실로 느껴진다. 
시간이 흘러 그 모욕성 발언에 대한 분노도 ‘그때는 그랬었지’식’의 한물간 이야기가 되어 버렸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런 발언이 있었고 뉴스화 되고 입에 오르고 내리니 신경이 쓰인다.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니고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 돼지”라는 발언한 공직자에게 화가 났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국민이라 일컫는 많은 사람이 개, 돼지 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제서야’ 라고 쓴 것은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늦게 알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물론 이 ‘개, 돼지’라는 표현을 부정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개 돼지에게도 존엄이 있는데 그들을 함부로 욕되게 하지도, 비하하지 말라고 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일단, 나의 생각은 우리가 사는 인간계는 계급이 있다. 아니 있다고 나 할까? 다들 쉬쉬하지만 만천하가 다 알고 있는. 계층? 신분? 이런 단어들이 더 적당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위계급에 속한다.
위에서 표현한 개, 돼지계급이다. 
오래전에는 개&돼지계급으로서 우리는 그저 숨만 쉬는 존재, 고기덩어리, 일하는 기계였다. 그런데 그 하위계층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삶이 괴로워진다. 다른 계급과 비교하는 마음이 커지기 때문이다. 다른 계급과 비교하는 마음이 커지기 때문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행복’ 이라는 말처럼 밥 잘 먹고 누울 곳 있으면 행복인데, 자기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높은 지위의 사람만큼 또는 그보다 더 좋은, 부(富)티 나는, 멋진 인생을 추구한다. 이렇게 가다 가는 사는게 힘들어진다. 이루어지기도 힘들고.

고로 나는 행복한 돼지이고 싶다. 웃는 돼지로, 돼지 살처분 없는 세상에서. 행복한 돼지가 되기 위해서는 행복의 조건으로 위장한 욕망으로 가득 찬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특별한 봉지 _ 2018, 한지에 분채, 60x42cm

안드레 세라뇨(Andres Serrano)의 작품 < 오줌예수 >를 오마주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이 그림이 시작되었다. < 오줌예수 >라는 작품은 소변을 담은 용기에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담아 찍은 사진작품이다. 작품의 이미지가 극단적이고, 반종교적이라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나는 작은 일에도 끙끙 가슴앓이 하는 유리멘탈을 가진 사람이고,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나와는 대조적으로 과감하고 도발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을 동경한다. 대리만족 이랄까? 단조로운 일상에서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몇 겹의 비닐봉지에 넣고 꽁꽁 동여매어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있다. 가슴 한편에 사직서를 고이 간직한 직장인처럼 말이다. 언젠가는 열리고야 마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몇 겹의 비닐이 삭아서 나의 욕망이 세상에 나오는 날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앙드레 세라뇨에 작품에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의 작품을 오마주 했다. 십자가 대신 비닐 봉지, 오줌 대신 빛. 빛의 세례를 받은 은혜로운 봉지. 흔하디 흔한 비닐봉지이지만 그 중에서 선택받은 그 특별한 봉지. 작가의 픽. 은혜로움과 특별함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은 봉지.

가자 행복의 나라로(행복의 나라로 오세요1, 2, 3)_ 2019, 한지에 분채, 85x165cm

행복 하려고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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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제목 "행복의 나라로 오세요"는 맥도날드의 행복의 나라세트 메뉴 광고 문구다. 그림의 아치형 풍선 역시 행복의 나라 메뉴를 알리기 위해 매장 입구에 설치된 인테리어에서 따왔다.

맥도날드가 말하기를 하루 종일 행복한 가격이라 행복의 나라 메뉴라고 했다. 간편하고, 빠른 패스트 푸드. 그나마 가성비 괜찮게 입안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다 먹고 풍선이 장식된 문밖으로 길을 나선다. 다시 시덥잖은 일이 가득한 나의 일상 속으로...

현재에 만족하며 순응하는 삶도 좋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행복한 삶을 꿈꾼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와 행복은 소소하다 할지라도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지금으로서는 멀게만 느껴진다. 어렴풋이 눈을 뜨면 보이는, 아지랑이 피어 오르는, 아련한 저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행복을 당장 손에 잡을 수 없기에, 대신 행복의 메뉴로 때우게 된다.
 줌마의 정원 _ 2019, 한지에 분채, 73x80cm

엄마의 인생은 나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줬다. 엄마의 소싯적 꿈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에서 그림이 시작되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은 먹고 사는 게 힘든 그런 시절이였다. 소녀인 엄마의 소원은 굶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것 이였다. 소녀에서 아가씨가 되고, 때가 되어 결혼을 했다. 그 후 엄마의 소원은 알콩달콩 단란한 가정이 꾸리는 것이 되었다.

그림의 여자는 엄마다. 아가씨에서 아줌마가 된 모습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새댁, 초짜 아줌마다. 전체 구도는 수태고지의 도상을 참고했다. 수태고지(聖母領報)는 성모마리아에게 가브리엘 대천사가 찾아와 성령에 처녀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 할 것이라고 고하고, 또 마리아가 그것에 순명하고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그 수태고지에서 내가 궁금한 것은 마리아의 상황과 기분이다. 아가씨에서 아줌마가 되는 순간의 마음 말이다. 마리아와 신성을 가진 분이기는 하지만 엄마의 마음과 어느정도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수태고지는 서양미술의 고전으로 많은 서양의 예술가들에 의해 그려진 주제이다. 토종 한국인인 내가 그리는 수태고지는 코리안 스타일이다. 나름의 각색과 재해석을 거쳤다. 까치는 기쁜 소식을 의미하고, 파란색 치마는 영광의 은총의 색, 순결의 백합 대신 복을 의미하는 모란으로, 궁전 같은 집은 키치적인 장난감 공주님 방으로.
삼대모녀의 여행_ 2018, 한지에 분채, 88×86cm

설거지를 하다가 얼핏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새로 개업한 마트를 홍보하는 애드벌룬이 보였다.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노파+흰색의 애드벌룬-풍선이 있는 풍경은 어린이날 이벤트처럼 설레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셀레임도 잠시, 마트옥상에 목줄이 매인 풍선이 날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풍선은 목줄이 정해준 자기만의 공간에서 포효하듯 날리고 있었다. 그 풍선은 동물원에 갓 잡혀온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날 좀 구해주쇼…”라고 하는 듯 했다. 그건 자유를 갈망하는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제스쳐.

  창 밖의 풍선을 바라보며 인생의 대부분을 골짜기 시골집에서 사시다 돌아가신 할머니, 가정사정으로 집을 벗어날 수 없는 엄마, 철이 안 들어 자유롭게 살고픈 나. – 3대 모녀의 여행을 상상해 보았다. (BGM 변진섭의 새들처럼)

집안일로 날 붙잡지 마요……그냥 날아가게 둬요 Let it fly*

*영화 대니쉬걸의 대사
꽃병 아가씨 가가(Miss vase gaga) _ 2018, 한지에 분채, 각 40x20cm(4작품)

노점에서 발견한 중고 꽃병. 한창 유행이 지나 어딘가에 쳐 박혀 있다가 나온 것 같아 보인다. 길바닥 자판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왠지 귀부인 같은 우아하고 소녀 같이 청초하게 느껴졌다. 너의 전성기는 어땠을까? 궁금했다. 이 애처로운 꽃병을 뒤로 하고 길을 걸으며 꽃병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려야지 했다.

그림의 제목은 퀸(Queen)의 노래 '라디오 가가(Radio gaga)'에서 나왔다. 비디오의 등장으로 잊혀지고 있는 라디오에 대한 애정과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예전 시대의 그리움을 담은 노래이다.

몇 년 전 텔레비전에 가수 H.O.T와 젝스키스(SECHSKIES)가 나왔다.(2018년) 그들은 나의 10대시절 나온 아이돌이고 정말 정말 인기가 많았다. 그 시절 10대 20대들은 에쵸티나 젝키에 열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이돌도 나이가 들고, 새로운 틴에이저 스타들에 밀려나게 되면서 활동이 뜸해지고...... 어느 순간 방송에서 볼 수 없었다. 내 또래들 또한 나이가 들어 아저씨 아줌마가 되었다.

TV에서 나의 십대 시절을 함께한 에쵸티와 젝키가 나왔을 때, 눈물이 났다. 주룩주룩 저절로. 이제 그저 그런 한물간 아줌마가 되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멋진, 간지나는 삶을 욕망하는 소녀는 여전히 내 안에 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퀸(Queen)의 노래 '라디오 가가(Radio gaga)' 중에서
So don′t become some background noise
A backdrop for the girls and boys
Who just don′t know or just don′t care
And just complain when you′re not there
You had your time you had the power 
 
You′ve yet to have your finest hour
Let′s hope you never leave old friend
Like all good things on you we depend
So stick around cos we might miss you

그저 배경음악으로 남지는 마
소녀들과 소년들을 위한 배경 말이야
그들은 너를 모르고 너를 신경 쓰지도 않는
그리고 네가 없으면 불평만 하는
너에겐 전성기가 너에게는 힘이 있었어
너의 최고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어 

 제발 떠나지 말길 바래 나의 오랜 친구여
아직 네게 의지하는 것이 너무 많아
그러니 우리 곁에 있어줘
우리가 너를 그리워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It’s your turn  _  2018, 한지에 분채, 60x50cm(2작품)

엄마를 오랜만에 본다. 엄마는 저번보다 더 늙고 초라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닌 사연과 그에 따른 고생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엄마의 고생은 더 가혹한 듯하다. 그 때문에 노쇠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다. 엄마의 아담한 체구는 안 그래도 작은데, 구부정해져서 더 작아졌다. 머리와 팔, 다리가 더 굽어지면서 가슴 안으로 파고드는 듯하다. ‘이러다 언젠가는 조그마한 공 같은 것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엄마의 깊은 주름과 축 처진 살갗은 슬프기도 하지만 가끔은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어느 순간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고, 텔레파시 같은 소리로 “It your turn.”이라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임무나 중책을 맡기면서 하는 대사인 “네 차례야~”. 하지만 엄마는 “It’s your turn.”같은 영어를 모른다. 그렇다. 그건 나의 착각이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꽤 흐른 요즘도 그 “It’s your turn.”의 여운이 이따금 떠오른다. 아마도 결혼해서 엄마로 사는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한다. “딸아…… 엄마로 사는 거 너도 해 봐~ 이제 네가 해야 할 때야. 사는 게 다 비슷하단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남과 다른 인생, 간지나는 예술가를 꿈꾸던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
 어느 날 새벽에 꾼 꿈  _ 2015, 한지에 분채, 72x98cm

   언젠가 친구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친구는 자기의 아지트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미래도시 같은 풍경의 하늘을 날라서 어느 고층 건물의 작은 방에 들어 갔다. 그 방은 소형 아파트 작은방 정도의 크기였고, 벽에는 그림이나 사진 같은 것들이 한 벽면 가득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한약방 약장 같은 작은 서랍이 많이 있는 서랍장이 있었다. 친구는 자기의 보물들이라며 서랍을 열어 그 안을 보여주기도 하고, 벽에 걸린 것들에 대해 설명 해주었다. 그리고 요즘은 여기 이 방에 자주 못 온다며 말하면서 아쉽고 실망스런 표정을 보였다.
  어느 새벽 꿈에서는 대학동기 나왔다. 학교 다닐 때 괴짜작가 같은 포스로 다니던 사람 이였다. 지금은 세 아이의 아빠고 학원을 운영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꿈에서 그 대학동기는 만나서 반갑다며, 자기 작업실을 보여 주었다. 작품들이 작업실에 꽤 많이 있었다. 근데 완성 된 것이 별로 없네 라는 생각을 들리지 않게 혼잣말 했다.
  또 언젠가 새벽 꿈에서는 나의 방인듯한 곳이 나왔다. 꿈의 배경, 그 방의 인테리어는 알듯 말듯한 의미들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꿈이 퀴즈를 낸 것 같았다. 힌트는 이 꿈의 세트장. 
 이 꿈들은 현실에서의 희망사항이 구현된 꿈이다. 꿈동산에 다녀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꿈들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으로 남겼다. 더 또렷한 나의 꿈을 찾기 위해. 

방 (한상연 지음 우리는 모두 예술가다. 중 pp190-194) 

내 방은 항상 그대로야.
때론 어지럽고 때론 가지런하지만 아무튼 난 알아.
방은 네 개의 벽으로 미소 짓는 꿈이라는 것을.
누구 꿈인지는 몰라.
꿈이란 게 원래 알려고 하면 사라져버리는 거니까.
그냥 잠을 깨듯 아침마다 난 방문을 나서지.
까맣게 잊어버리는 거야.
기쁨과 슬픔에 온종일 곤드레가 된 채 내게 방이 있다는 사실
따윈 기억하지도 못하는 거지.
밤이 되어도 달라질 건 별로 없어.,
난 낮 동안의 격정들에 이미 취해버렸으니까.
고단한 몸을 누일 이부자리 같은 거나 생각할 뿐 난 여전히 방을
기억하지 못하지.
심지어 방에 있을 때도 내 마음은 무언가 다른 것을 향해 있는 거야. 

어느 가을날이었어.
난 잠에서 재자마자 창문을 열었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군 .
차가운 공기가 가슴을 파고드는 동안 난 문득 깨달았어.
내 삶은 항상 꿈이었으며, 그 꿈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다는 것을.
길몽인지 악몽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런 건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아무튼 중요한 건 내게 방이 있다는 거였지.
네 개의 벽으로 굳어버린 꿈속에서 난 늘 바깥 세계를 꿈꾸지.
그 꿈은 아마 무한에의 꿈일 거야.
세상은 원래 무한한 법이니까.
벽을 친다고 세상이 갑자기 유한해지는 건 아니잖아. 

난 자신에게 말했어.
모든 걸 사랑하고 싶다고.
무한을 꿈꾸는 자는 원래 모든 것을 긍정해야만 하는 자라고.
물론 난 그럴 수 없지.
때로 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 거야.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난 곧바로 세상이라는 이름의 그 벽 없는 꿈을 망각해버릴 테니까. 하지만 상관이야 있을까?
어쨌든 난 꿈속에 있지.
벽 없이 무한한 꿈과 방으로 굳어진 꿈, 내겐 그게 세상의 전부인 거야.
길몽이든 악몽이든 난 상관 안 해.
어느 꿈이 좋은지도 따지지 않을 테야.
아무튼 난 살며 사랑하고 싶어.
그냥 모든 걸 긍정하면서 말이다.
 엄마의 한숨에서 나온 아이들  _ 2018, 한지에 분채, 68x50cm

   주호민 작가의 만화 ‘신과 함께’을 전철에서 봤다. 부모에게 불효하면 떨어지는 지옥이 나오는 그 부분을 보며, 전철에서 펑펑 울고 싶었지만 참고 찔금 찔끔 눈물을 지렸다. 그 만화대로라면 나는 아마도 지옥에 갈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태도와 과거에 했던 성적 과오, 지금도 진행중인 불륜에 대해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의절하다시피 한 상태이다. 부모님께 의절의 태도를 보여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으셨다. 만화 ‘신과 함께’식 표현에 의하면 나는 불효로 ‘부모마음에 대못을 박은 자’이다. 그래서 부모마음에 대못을 박은자는 지옥행 저승길이라 한다. 이제까지 살면서 큰 잘못은 없었던 것 같은데……지옥이라니……
  엄마는 텔레비전에 나온 유명인들이 가정을 이루고 단란하게 사는 모습이 나오면 "참 부럽다"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가정적인 남편, 똑순이 아내, 귀여운 아이들…… 나는 우리 집도 그런 가정과 비슷하다 생각했고,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엄마가 부러워하던 평화로운 그런 정상가정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나고 알았다. 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도 정상가족이 아니라는 것도……엄마가 꾸린 가정에는 가부장적이고 바람기 많은 남편, 거기다 쪼들리는 가정 경제, 홀로서지 못하고 아픈 몸이 되어버린 아들, 집에 있기 싫어하는 딸, 한숨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이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라는 안나 카레리나 법칙처럼 가족의 불행한 이유는 늘어가며, 회복전망은 깜깜하기만 하다. 
  엄마는 늘 행복한 가정을 강조하셨다. 좋은 남자 만나 아이 낳고 키우며 무탈하게 사는 것! 사실 나는 현재 무탈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넉넉하진 않아도 남편의 외벌이로 먹고 살며 소소하게 작업도 하고 있고, 그리고 귀여운 아들과 나를 이해해주는 남편이 있어 나름 화목한 가정이라 할 수 있다. 엄마가 이루지 못한 소원이 나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일까? 엄마는 이렇게 내가 정상가족으로 사는 모습 보여줘서 고맙다고 한다. 이런 정상가족이라는 나의 조건이 엄마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는데 반영이 되어서, 나의 효도점수는 플러스 알파가 되고 나의 저승길 종착지인 지옥행이 변경되었으면 좋겠다.
  아…… 이 글은 뭐가 뭔지 결론내기 힘든 글이고, 그냥 나의 생각이 그렇다고 하는 글이다.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가사처럼 말이다. -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일.  눈물로 시작했고, 쓰는 내내 한숨이 나고, 꽤 오랫동안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글이고, 앞으로 품고 있어야 할 글이다.
 엄마, 미투(Me too)하시고 여행을 떠나요! _ 2018, 한지에 분채, 150x1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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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 too + With you 
  2018년 3월, 미투(Me too)운동이 열풍(?)이다. 여기저기서 꾹꾹 눌렀던 말들이 나오고 있다. 잠긴 목소리의 선언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미투 운동을 보면서 남의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남일이 아니다.
. ‘#미투, 나는 아빠를 고발한다.’
  어른이 되어 알게 된 아빠는 요새말로 쎅(sex)를 좋아 하시며, 그에 따른 국가인증 공식사고 기록도 가지고 계셨다.(피해자는 많이 어렸다.) 감정을 짖누르지만 본인에게는 잘 자각되지 않는듯한 폭력도 있으셨다. 하지만 자식에게는 손대지 않았고, 성실히 일해 양육비의 의무는 다하셨다며 떳떳하시고 당당하시다. “남자가 그 정도하면 되지.”라는 논리와 근자감. 지금도 집에서5분거리에 사시는 여자분과 연애 중이시다. 엄마는 왜 헤어나오지 못하는가? 엄마의 취향은 마조히스트인가? 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엄마는 아빠에게 길들여 진 것 같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거기다 말기암환자인 아들의 돌봄 비용도 필요 할테고……
  나는 우리가정(친정)의 내부적인 미투를 회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일 쏟아지는 미투뉴스를 보며 ‘#미투, 나는 아빠를 고발한다.’라는 문장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저 문장까지 오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추잡한 현실을 외면하기도 했고, 시댁보기 챙피하니 알리지 말라는 엄마의 현실적인 부탁, 바쁜 세상 패스트하게 살지 긁어 부스럼을…뭘… 그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뭐하자고 지저분한 팩트을 드러내는가 싶다. 공감을 얻고자 하는 것 인가? 곪은 상처를 도려내고자 하는 것 일까?
인터넷에서 ‘#미투, 나는 아빠를 고발한다.’는 기사를 봤다.
  “다들 그렇게들 살어.”  “그 정도는 아니라서.” “무엇이 우리의 경험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가”  이 말에 나는 ‘찌릿’했다. 내가 주저하는 이유가 이 문장에 있었다.
< 아주 친밀한 폭력 >에서 저자는 말하는 자의 고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프리모 레비는 평생 ‘경험한 자아’와 ‘말하는 자아’ 사이의 간극에 시달렸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그 비극을 경험하지 않은 ‘특권’을 가진 자에게 베풀어야 하는 배려와 관용. 나는 이 부정의를 참을 수 없다. 나는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고통, 폭력, 슬픔이 연구되기 어려운 이유라고 생각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이 언어화될 때만이 우리는 위로 받을 수 있다. 내 고통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인식만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나의 언어는 그림이다. 그림으로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다시 한번 더 #미투, 나는 아빠를 고발한다! 그런데 쓰면 쓸수록… 허무한 메아리 같은 말이다. 
아이 _2016~

문득 작업은 왜 하는가?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이 튀어 들어와 균형이 깨지고, 힘들어지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어머니들처럼 정화수 떠놓고 비는 것처럼, 미련하게 복을 기원하기 위해서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복을 기원하는 나의 행위는 극히 소극적인 것이라서 힘이 빠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작업은 무엇인가” “작업은 왜 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그럴 때 마다 작업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 아이들의 그림처럼 검열 없이 나의 머리와 나의 손이 찾는 자연스런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자연스런 소재로 찾은 것은 지금 가장 애정을 쏟고 있는 존재 ‘아들(아이)’이다. 아이를 그리며 애정을 쏟아 시간이 좋다. 사랑하는 존재를 마음을 담아 그리는 것. 이것이 그림이 주는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을 믿고 꾸준히 헤쳐 나아가는 것은 자신의 신념을 성스럽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된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아름답게 만드는 것처럼 자신이 믿는 것은 성스럽게 만든다.”

- 에르네스트 르랑 -

 세젤안 어린이집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어린이집)_ 2018, 한지에 분채, 108x170cm

학대받고, 버림받고, 어른들의 싸움에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여러 뉴스를 접하면서 이 그림을 구상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그래서 그런 뉴스에 더더욱 감정이입이 된다. 슬프고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소액의 금전기부를 하고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그림으로 남긴다 것이 부질없다고 느껴 지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뿐이라는 생각에 정성껏 그리게 된다. 고통받고 죽어간 아이들을 애도하며 사후세상의 이상향을 그렸다.

*작업의 모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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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주택가 혹은 아파트 주변 거리를 걷다가 보면, 알록달록 다른 세상 같기도 하고 그 자체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건물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어린이집.’ 고만고만한 콘크리트 건물 사이 어린이집을 만나면 미시감이 들기도 한다.
어린이집은 아이들의 오아시스이자 안전지대, 파라다이스를 표방하며,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려고 한다.

 미시감(jamais vu, 자메뷰): 평소 익숙했던 것들이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지는 형상
  백린탄: 하늘이 내려 주는 축복의 표현같은, 낮에 하는 불꽃놀이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무서운 살상무기이다.이번 생에서 고통으로 죽은 아이들이 가는 이상향의 세계에서는 부디 축복의 폭죽 이기를 바란다.

  청록산수: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은 조선시대 궁중화원인 안중식의 [도원문진도]를 참고로 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낙원. 인간은 누구나 머물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에 대한 꿈을 이상향이라 불렀다. 이상향은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환상공간으로 때로는 대안적인 세계로 나타난다. (국립중앙박물관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 평화로운 세상은 [도원문진도]처럼 아련하다.

 지문이 닳도록 하는 돌봄  _ 2017, 한지에 분채, 25X40cm

라깡의 말대로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시체를 껴안고 울며불며 사막을 헤매는 것. 이것이 딸들의 인생이다. 몇 년 전 내가 쓴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기보다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어머니를 만난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 정희진, 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까? -

어디선가 듣기를 "하느님이 아이들을 다 돌보기에는 손이 부족하셔서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다는데....." 그 엄마들은 하느님이 주신 막중한 사명 때문인지, 엄마가 되는 순간 돌봄의 늪에 빠지게 된다. 돌봄의 늪은 한번 빠지면 평생 그 곳에서 자리잡게 된다. 가수 조관우의 '늪'의 노래가사처럼 말이다 – 멈출 수가 없었어. 돌아서야 하는 것도 알아….

  아이들은 돌봄의 늪에서 자라나고,
  어른이 되어서 늪에서 나와 사막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사막에 드리운 엄마의 그림자는 깊고 길다
  엄마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다
 낙엽  _ 2017, 한지에 분채, 42X33cm

 낙엽은 가루가 되어 흙이 되겠지….. 가을살이 인생
우주적 시선에서, 사람도 낙엽도 한 점의 티끌도 되지 않는 삶을 살다가 간다. 봄, 나무에는 새로운 잎이 돋지만, 그것은 내가 지난 가을에 본 그 낙엽이 아니다.
가을. 거리에 떨어진 무수히 많은 낙엽 중 하나. 그 낙엽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종이에 남긴다.

김춘수의 시 ‘꽃’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었다. 나는 이름 부르는 대신 그림으로 남겼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사소한 어떤 것이라도, 그것에 대한 감정이 살아있다면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었으면 한다.


 살림의 여왕의 트로피  _ 2017, 한지에 분채, 68X44cm

​무엇이든 뭐든 다 귀찮게 만들어 버리는 무더위가 기승인 어느 여름 날. 저녁준비를 하기 위해 찬장을 열었다. 그 안의 그릇이 뒤죽박죽 쌓여서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계속되는 더위에 살림의지가 꺾여버려서 신경을 못 썼더니, 그런 안쓰러운 모습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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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을 소홀히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더운 날에 가족을 위해 식사 준비하는 내가 참 대견한 것 같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수고했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학교 갔다 집에 오니 엄마가 ^^얼굴로  맞아 주셨다 _ 2017, 한지에 분채, 65X42cm

엄마는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드라마 단골 소재 같은 고생이다. 시집살이, 내 집 마련, 병수발, 사기… 이런저런 궂은일 등등……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엄마는 변두리 집 한 채를 마련하셨다.

어렵게 장만한 만큼이나 소중했던 그 집을 떠올려 본다. 그 시절 유행한 인테리어는 일명 홈-패션! 봉제로 만든 것들로 꾸미는 것이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큰 꽃이 프린트 된 치렁치렁한 커튼과 샤방 샤방 레이스가 달린 천, 알록달록 인조보석이 들어간 장식품, 샹들리에가 집안 곳곳에 자리했다. 내 집을 마련한 기쁨이 표현된 엄마표 인테리어인 듯하다. 그러나 몇 년 뒤 얄궂은 일로 집은 더 이상 우리집이 아니게 되었다.

그 집에서 엄마는 고생은 그만, 우아한 일상, 아니 별탈 없이 가족이 하하호호 살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 집에서 보낸 시간은 참 신기루 같다. 그 때, 꿈꾸는 눈빛을 한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된 지금의 나 역시도 그림 같은 집, 아니, SNS에 나오는 멋~찐 집 같은데서 가족들과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싶다는 꿈이 있다. 아… 중요한 것을 빼먹었다. 땅값 내릴 일 없는 지역의 자가 주택이여야 한다!


 원래 빛나는 돌의 영광  _ 2017, 한지에 분채, 67X42cm

Ⅰ  그림의 시작은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를 본 것’이였다. 그 뗀석기 보며 ‘저것이 인간이 도구를 사용한 시초겠구나. 도구를 사용하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겠지. 더불어 소유에 대한 욕구도 깊어져 가고,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화된 인간이 되는구나.’라고 흔하고도 뻔한 혼잣말 같은 생각을 했다. 역사 무식쟁이인 나의 근본 없는 생각.
 뗀석기 이후, 도구의 사용으로 조금 더 발전된 우리 인류는 소유나 경제에 관념이 생겨났다. 그것은 현재의 언어로는 바로 ‘돈’.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돈’, 과연 ‘돈’은 무엇이지? 그런 생각 저런 고민 필요 없이 뭐니 머니 해도 ‘돈’이 최고지!  창밖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텔레비전에 나온 멋진 셀렙들도, 나 또한 온통 ‘돈’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많은 세상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은 돈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돈을 벌기 위해 위해 일을 하고, 전쟁도 하고, 몸도 팔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그런다. 사람에게서 돈이 없다면 ‘무’와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 같다. “그대가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그대의 화폐는 할 수 있다.”* 이라는 말처럼, 화폐 즉 돈을 만들어낸 것은 사람이지만 사람은 돈에 장악되고 말았다!
 어쩌다 보니 뗀석기를 보며 돈에 대한 찬양에 이르게 오게 되었다. 어쩌다 살게 된 삶. 돈이 없으면 물질적으로 고달프긴 하지만 고달픔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니깐 붓으로 행동 해야 한다. 고달픔을 그림 그리는 행위로 잊어야 한다.

Ⅱ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에서  자수정 마노석 같은 천연석들을 봤다. 겉은 거친 모래와 돌이고 안쪽은 원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천연석 알맹이 처럼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나의 탈렌트 빛내고 싶다. 나의 생산물-작업들이 스스로 빛이 별이 되기를 매일매일 꿈꾼다. 아주 야무지게도 꿈을 꾼다. 

Ⅲ  뗀석기에서 천연석으로 이어진 이 그림의 여정은 파라마운트사 영화의 오프닝 장면으로 이어진다. 나의 작업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가끔은 희망을 남발하여 희망고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까지 희망고문이었던 고달픈 삶에서의 희망과 바램은 그것이 실현되었다는 확정된  미래 시제로 만들고 싶었다. 희망고문은 이제 그만~ 우리의 앞날은 이미 좋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영광과 찬란함이 공존하는 이미지로 파라마운트사 오프닝 장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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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 – 철학수고의 화폐 부분
My Querencia  2017

퀘렌시아(Querencia)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투우사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 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른다. 회복의 장소이기도 하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 일부) 

나의 퀘렌시아는 작업실이다. 작업실이라고 썼지만, 사실은 집이다. 주방 한쪽, 책상, 거실 바닦 등이 나의 작업실이다. 나에게 몰입 할 수 있는 공간이자, 삶의 에너지 재충전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장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집-작업실이 실재의 ‘퀘렌시아’라면, 작업실에서 하는 작업들은 내면의 ‘퀘렌시아’이다. 식탁 혹은 책상 앞에 앉아서 브레인 스토밍 같이 떠도는 생각들을 잡는다. 그리고 그린다. 말재주도 글재주도 없는 내가 수다를 떨 수 있는 무대가 그림인 것이다.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생각들은 나의 주변이야기이다. 아이가 크는 모습을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의 소환되는 경험, 인터넷 기사에서 봤던 학대 받는 아이들의 고통스런 뉴스, 로또 당첨, 전시 대박 같은 속물적인 소원 등을 그림으로 풀어 놓는다.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은 ‘자기만의 방’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는 방과 년30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 떠오른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자기만의 영역을 잃어버리고 산다. 피곤하고 바쁜 일상에 치여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더욱 더 가지고 싶어한다. 각종 인테리어 잡지에는 베란다나 주방 한켠에 카페나 작업실을 꾸린 기사들이 나온다. TV에서 맨 케이브(man cave)라는 것을 봤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남자들이 지하실 같은 공간이나 방에 자기만의 취미와 여가활동으로 가득 찬 방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남성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나 또한 주방 한쪽 식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그림을 끄적이는 시간이 행복하다. 그 끄적임이 나의 작업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주방식탁에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대학졸업 무렵, 나는 하루키의 작업스타일에 대한 글을 읽고 동경했다. 작업실 구할 형편이 아니기도 했고, 거창한 작업신고식 없이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작업을 하고 싶었었던 것이다.   Welcome to my querencia!
나의 퀘렌시아*(my Querencia _ 2016, 한지에 분채, 140x260cm(3폭)

작가 개인의 경험과 생각이 담긴 책가도를 의도 하였다. 책장에 있는 책과 여러 잡동사니와 통해, 과거와 현재의 생각, 미래에 대한 바램을 엿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현재 결혼과 육아가 최대 관심사이다. 그래서 그림에는 엄마로 사는 이야기와 사회적 관심사, 가족에 대한 기복적인 마음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책장이라는 공간은 일상을 정리하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안식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퀘렌시아(Querencia)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투우사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 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부른다. 회복의 장소이기도 하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중 일부)

  책장에 책들: 실제 집에 있는 책이다. 나와 나의 가족의 모습과 관심사,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책의 제목으로 나타냈다.커튼: 짜잔~하고 나의 퀘렌시아(Querencia)를 드러내는 느낌. 커튼의 무늬는 계란후라이 같이 알이 깨져있는 모양이다.
1.마트로시카, 금줄: 러시아전통인형으로 어머니 몸체에서 작은 인형들이 나오는 형태로 행운과 다산을 뜻하는 인형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서 큰 영향(금줄-출산)을 준 일에 대해 그렸다.
2.달력, 복주머니: 시간(날짜)는 가는데, 복(기회)은 언제 오나 기다리는 마음. 
3.웨딩케이크: 결혼이라는 이벤트와 기대와 로망.
4.아이구두: 어린시절에 대한 데자뷰를 일으키며, 새삼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5.베이비 박스: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된 부모가 아이를 두고 갈 수 있도록 마련된 상자. 엄마가 되면서 아이 관한 문제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있다.
6.일월오봉도: 좋은 세상을 기원. 
7.워터볼과 나비: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동경. 여행 가는 일탈을 꿈꾼다. 
8.원앙:  부부금슬 좋기를 소망 
9.전시장: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멋진 전시에 대한 소망 
10.성모상과 전구: 소원을 비는 마음 
11.선인장: 어릴 적 집에 있던 식물의 대부분은 선인장 이였다. 지겹고 묵은 과거 같은 것이 뿌옇게 되는 필터를 거쳐 가끔씩 떠오른다. 
12.파 그림과 글씨: 서명, 분신. 현재 작가 자신이 생각하는 덕목-믿음, 소망, 사랑(信望愛) 
13.곰인형: 손으로 눈을 가리지만 약간의 여지를 남겨둔 채, 움츠리고, 엉거주춤 세상을 바라봄.나이로는 성인이 되었지만 세상이 두렵다. 극복하고 싶은 의지
14.돌탑과 무지개: 소원을 비는 마음에 하늘이 무지개로 응답
15.공중 관람차와 구름: 놀이공원에 대한 어린 시절의 로망과 잊혀진 추억이 아이를 키우면서 불쑥 떠오른다. 나에게 있어 공중관람차는 화목한 가정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구름 속에 가려져 있다.
16.연꽃과 촛불: 행복한 삶,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한 염원
17.열쇠와 열쇠구멍: 남자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열쇠와 열쇠구멍
18.빵과 카푸치노: 여유 있는 휴식
19.벌거벗은 인형: 아이를 키우며 잊혀졌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릴 적 인형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고 가학적으로 다루었던 인형에 대한 기억이 난다. 그 인형들에 대한 미안함과 속죄
20.인형의 집: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에 대한 동경.
  - 알: 어느 날 밤 자고 있는 가족들을 보니 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가능성과 미래를 축복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즉 하나의 틀을 뛰어 넘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벽을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중)
21.돈: 부(富)에 대한 부러움.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지만, 돈이 전부인 듯 느껴진다. 부자가 되고 싶고, 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22.앉아서 차 마시는 자유 여신상: 바쁜 일상 중 하던 일을 내려놓고 휴식
23.붓과 주방도구: 살림하며 그림 그리는 나의 지금의 모습
24.책장 하단의 수납장 문 그림: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꿈꾸는 무릉도원의 이미지.
휴식 _2016, 한지에 분채, 140x130cm(2폭)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피곤한 일상 에 쉬고 싶은 마음을 담은 그림.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달을 보면 소원을 빌고, 집 근처 북한산-가까이 있지만 빠듯한 일과에 가지 못해 신기루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빵과 차를 마시며 여유 있는 쉼을 갈구하지만 어느 한편에 쉼이 불편하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은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한다.
사건사고 많은 요즘,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이렇게 집에 돌아올 수 있음에 안도하게 된다.
감모여재도 - 원영이에게 _ 2017, 한지에 분채, 100x70cm

2014년 친부와 계모의 가혹한 학대로 생을 마감한 원영이 사건의 기사의 사진 한 컷에서 시작되었다. 아이가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 아팠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의 무기력함에 더더욱 힘들었다. 원영이가 편히 잠들고, 다음 생에는 좋은 부모 만나 행복하길 바라며 작업하였다.
 자화상 _2016, 한지에 분채, 90x140cm 

하트무늬털의 장막과 바니타스화(인생무상을 표현한 그림,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도 있음)를 닮은 정물은 지금을 사랑하며 충실히 살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쓰러질듯한 화병에 꽂혀있는 시들한 꽃들은 어떤 시련이 와도 오뚜기처럼 중심을 잡으려는 나의 의지를 말한다. 자식 잘 기르는 모성애 상징하는 알밤. 건강한 자손을 상징한다고 하여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주었다는 대추.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나비. 집에서 식사담당을 하게 되면서 익숙한 친구가 된 파와 과일. 이런 정물들로 현재의 ‘나’를 이야기한다.
트로피 _2017, 한지에 분채, 140x40cm

12월말 어느 날 밤. 온갖 매체에서 시상식을 연다. 그 해의 끝을 잡고, 화려하고, 성대하게, 마무리되고 있다. 시상식에 초대된 유명인들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모습 그대로 스타다. 그냥 있어도 빛이 나는데 더 빛이 나게 번쩍번쩍한 트로피도 받는다.

근데 말이지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이 세상이 몰라준다. 섭섭해. 나는 누가 상 안주나?
허전한 마음을 술 한잔과 안주로 달랜다.
 
근데……
유명인과 나를 비교하면 안 되지!!!!